언론 조선일보를 관통하는 이념
2007.04.27 15:20
조선일보를 비롯한 자칭 '보수세력'들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게 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난다 치자. "많은 아이들이 굶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거의 캠페인성으로 몇 회에 걸쳐 기획기사를 싣는다. 거기에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정부는 뭘하고 있느냐면서 열라 까댄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나 법안, 복지 비용의 확충과 같은 데에는 극렬하게
저항한다. 좌파정권이니 사회주의니 포퓰리스트니 어쩌고 저쩌면서.
결국 그 가난한 사람들의 몇몇 사례는 '우리 신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라는 양념일 뿐이고, 정부를 까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는 거지.
'수험생들이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찌들어가고 있다'라는 기사를 어쩌다 한 번씩 쓰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학들은 애들 성적순으로 뽑아야 한다', '대학 신입생들
경쟁력없다', '평준화 같은 건 폐지해야 한다'와 같은 소리를 읊어대고 있지.
그게 우리나라의 보수 신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증오하는 거다.
아래는 퍼온 글.
하재근 / 작가, 칼럼리스트
"국사는 없다"를 외치는 급진적 인문학자 임지현의 문제제기는 조선일보의 지면에 자주 소개된다. 그가 책을 내거나 학회에서 무슨 발언을 하면 조선일보는 즉각 지면에 소개한다. 한국에 인문학자가 얼마며 학회는 또 얼마나 많은데 왜 임지현을 그렇게 총애하는 걸까?
임지현은 포스트 민족주의, 포스트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은 결국 소수가 타자를 배제하는 파시즘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젠 낡은 것이 돼버린 민족주의, 국가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이상하다. 대한민국 수구껄텅들과 이런 급진적 인문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일보는 일제시대 때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바쳤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군부에 충성을 바쳤고 지금은 박정희를 향수하며 중도우파 정권더러 좌파라 하는 극우 파쇼의, 파쇼에 의한, 파쇼를 위한 집단이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열광으로 치면 조선일보를 따라올 자는 대한민국에 별로 없다. 그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숭상하고 징기스칸의 제국을 향수한다. 우리나라와 외국 간에 역사, 영토 등의 문제가 생기면 즉시 호들갑을 떨며 대중의 민족감정을 선동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다.
이렇게 따지자니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국가보안법을 결사적으로 옹위하면서 또 한편으론 자유주의를 외치는 이 기괴함은 또 뭐란 말인가. 탈근대적 인문학과 근대의 소산인 민족주의의 기이한 공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국가보안법의 기이한 공존. 왜일까? 저들이 정신분열증자이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저들이 괜히 껄텅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껄텅에게 정신분열증은 사치다. 껄텅은 오직 '하나'만 알고 '하나'만 추구한다. 여러 가치들 사이에서 모색하고 고뇌하는 것은 껄텅의 몫이 아닌 것이다. 분열 같은 복잡한 정신상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집단이 바로 한국의 수구껄텅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오매불망 놓지 않는 그 '하나'가 무얼까? 바로 '이익'이다. 자기 손에 움켜쥔 것은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본능, 남의 것까지 빼앗아 가지겠다는 탐욕. 그 집요한 욕망이 바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이념이 된다.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한편으론 박정희를 향수하며 또 한편으론 자유주의 뉴라이트를 외쳐야 하는 이 분열적인 상황에서 극심한 자기모순에 빠져 고뇌하겠지만 껄텅에게 그런 고뇌는 없다. 껄텅의 세계에는 모순이나 분열이 없다.
한국 수구껄텅의 정신세계에선 자신들만의 배타적 이익이라는 절대적 총체성의 지평 위에 모든 모순되는 가치들이 화해한다. 오늘 하는 말과 내일 하는 말이 서로 대립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애초에 신경쓰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때 그때 달라요"인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문제는 이런 집단과 자꾸 토론을 하려는데 있다. 저들과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이유는 저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저 자신에게 이익만 된다면 가치와 가치 사이를 '미친듯이' 횡단하며 질주하고 전복하며 탈주한다. 토론이 가능할 턱이 없는 것이다.
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입에 올리곤 하는 어떤 가치의 합리성, 의미의 올바른 실현이 아니라 자신들에의 유용함 뿐이다. 무엇이 나의 이익을 위해 유용한가, 오직 이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를 유용함으로 환원하는 주류경제학을 한국의 껄텅들이 선호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물론 그들은 이걸 '실용주의'라는 말로 바꾸길 즐기지만 말이다.
(1)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유용성 -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돌린다.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켜 권리의 자각과 요구를 유예시킨다. 국가의 영광이 곧 개인의 영광이라고 세뇌해 개인적 욕구를 말살한다. 대중이 자기의 몫을 요구하는 것을 막아 저들의 기득권을 보호한다.
(2) 자유주의의 유용성 -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해 자신들의 탐욕을 무제약적으로 누릴 권리를 스스로 보장한다. 민주적 권력이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이 사회를 강자들이 할거하는 무정부 상태로 만든다. 약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보호다. 자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강자 뿐이다. 심판을 필요로 하는 것은 페어플레이의 의지가 있는 사람 뿐이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는 강자에겐 심판(국가권력, 정부)의 간섭이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슬로건은 언제나 "국가 규제를 줄여라!"다.
(3) 국가보안법의 유용성 - 인위적 긴장상태를 조성해 다양한 요구를 억압한다.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국가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쉽게 환치시켜 말살한다. 저들은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해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을 곧 국가안보의 위협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들의 탐욕을 더 분방하게 채우고 싶을 땐 자유주의를 말하며 국가권력을 비토한다.
(4) 포스트 국가주의의 유용성 - 포스트 국가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근대 민족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탈근대적 사고방식이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이 힘을 모아 강력한 국가권력을 건설하는 것을 '대중독재'라며 경계한다. 임지현의 최근 책 제목이 바로 '대중독재'다.
대중독재에 대한 경계는 곧 민주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된다. 저들이 국가권력을 온전히 장악했을 때는 포스트 국가주의가 필요 없었지만 청와대를 잃은 지금 임지현 같은 학자의 조력은 청와대를 무력화하고 기득권을 지키는데 대단히 유용하다.
이 네 개의 가치가 조선일보의 지면을 분열적으로 수놓고 있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총체성 속에서, 바로 기득권집단의 이익이라는 단일한 지평 위에서 조직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슈들에 대해 온갖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결국 '소수의 탐욕의 지평' 대 '공공성의 지평'간의 대결이다.
공공성이라는 합리성이 강자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 인간애의 이념이 탐욕의 이념에 승리할 수 있을까?
원문 출처 :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16300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게 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난다 치자. "많은 아이들이 굶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거의 캠페인성으로 몇 회에 걸쳐 기획기사를 싣는다. 거기에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정부는 뭘하고 있느냐면서 열라 까댄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나 법안, 복지 비용의 확충과 같은 데에는 극렬하게
저항한다. 좌파정권이니 사회주의니 포퓰리스트니 어쩌고 저쩌면서.
결국 그 가난한 사람들의 몇몇 사례는 '우리 신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라는 양념일 뿐이고, 정부를 까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는 거지.
'수험생들이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찌들어가고 있다'라는 기사를 어쩌다 한 번씩 쓰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학들은 애들 성적순으로 뽑아야 한다', '대학 신입생들
경쟁력없다', '평준화 같은 건 폐지해야 한다'와 같은 소리를 읊어대고 있지.
그게 우리나라의 보수 신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증오하는 거다.
아래는 퍼온 글.
하재근 / 작가, 칼럼리스트
"국사는 없다"를 외치는 급진적 인문학자 임지현의 문제제기는 조선일보의 지면에 자주 소개된다. 그가 책을 내거나 학회에서 무슨 발언을 하면 조선일보는 즉각 지면에 소개한다. 한국에 인문학자가 얼마며 학회는 또 얼마나 많은데 왜 임지현을 그렇게 총애하는 걸까?
임지현은 포스트 민족주의, 포스트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은 결국 소수가 타자를 배제하는 파시즘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젠 낡은 것이 돼버린 민족주의, 국가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이상하다. 대한민국 수구껄텅들과 이런 급진적 인문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일보는 일제시대 때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바쳤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군부에 충성을 바쳤고 지금은 박정희를 향수하며 중도우파 정권더러 좌파라 하는 극우 파쇼의, 파쇼에 의한, 파쇼를 위한 집단이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열광으로 치면 조선일보를 따라올 자는 대한민국에 별로 없다. 그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숭상하고 징기스칸의 제국을 향수한다. 우리나라와 외국 간에 역사, 영토 등의 문제가 생기면 즉시 호들갑을 떨며 대중의 민족감정을 선동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다.
이렇게 따지자니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국가보안법을 결사적으로 옹위하면서 또 한편으론 자유주의를 외치는 이 기괴함은 또 뭐란 말인가. 탈근대적 인문학과 근대의 소산인 민족주의의 기이한 공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국가보안법의 기이한 공존. 왜일까? 저들이 정신분열증자이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저들이 괜히 껄텅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껄텅에게 정신분열증은 사치다. 껄텅은 오직 '하나'만 알고 '하나'만 추구한다. 여러 가치들 사이에서 모색하고 고뇌하는 것은 껄텅의 몫이 아닌 것이다. 분열 같은 복잡한 정신상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집단이 바로 한국의 수구껄텅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오매불망 놓지 않는 그 '하나'가 무얼까? 바로 '이익'이다. 자기 손에 움켜쥔 것은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본능, 남의 것까지 빼앗아 가지겠다는 탐욕. 그 집요한 욕망이 바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이념이 된다.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한편으론 박정희를 향수하며 또 한편으론 자유주의 뉴라이트를 외쳐야 하는 이 분열적인 상황에서 극심한 자기모순에 빠져 고뇌하겠지만 껄텅에게 그런 고뇌는 없다. 껄텅의 세계에는 모순이나 분열이 없다.
한국 수구껄텅의 정신세계에선 자신들만의 배타적 이익이라는 절대적 총체성의 지평 위에 모든 모순되는 가치들이 화해한다. 오늘 하는 말과 내일 하는 말이 서로 대립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애초에 신경쓰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때 그때 달라요"인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문제는 이런 집단과 자꾸 토론을 하려는데 있다. 저들과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이유는 저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저 자신에게 이익만 된다면 가치와 가치 사이를 '미친듯이' 횡단하며 질주하고 전복하며 탈주한다. 토론이 가능할 턱이 없는 것이다.
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입에 올리곤 하는 어떤 가치의 합리성, 의미의 올바른 실현이 아니라 자신들에의 유용함 뿐이다. 무엇이 나의 이익을 위해 유용한가, 오직 이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를 유용함으로 환원하는 주류경제학을 한국의 껄텅들이 선호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물론 그들은 이걸 '실용주의'라는 말로 바꾸길 즐기지만 말이다.
(1)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유용성 -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돌린다.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켜 권리의 자각과 요구를 유예시킨다. 국가의 영광이 곧 개인의 영광이라고 세뇌해 개인적 욕구를 말살한다. 대중이 자기의 몫을 요구하는 것을 막아 저들의 기득권을 보호한다.
(2) 자유주의의 유용성 -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해 자신들의 탐욕을 무제약적으로 누릴 권리를 스스로 보장한다. 민주적 권력이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이 사회를 강자들이 할거하는 무정부 상태로 만든다. 약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보호다. 자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강자 뿐이다. 심판을 필요로 하는 것은 페어플레이의 의지가 있는 사람 뿐이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는 강자에겐 심판(국가권력, 정부)의 간섭이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슬로건은 언제나 "국가 규제를 줄여라!"다.
(3) 국가보안법의 유용성 - 인위적 긴장상태를 조성해 다양한 요구를 억압한다.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국가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쉽게 환치시켜 말살한다. 저들은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해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을 곧 국가안보의 위협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들의 탐욕을 더 분방하게 채우고 싶을 땐 자유주의를 말하며 국가권력을 비토한다.
(4) 포스트 국가주의의 유용성 - 포스트 국가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근대 민족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탈근대적 사고방식이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이 힘을 모아 강력한 국가권력을 건설하는 것을 '대중독재'라며 경계한다. 임지현의 최근 책 제목이 바로 '대중독재'다.
대중독재에 대한 경계는 곧 민주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된다. 저들이 국가권력을 온전히 장악했을 때는 포스트 국가주의가 필요 없었지만 청와대를 잃은 지금 임지현 같은 학자의 조력은 청와대를 무력화하고 기득권을 지키는데 대단히 유용하다.
이 네 개의 가치가 조선일보의 지면을 분열적으로 수놓고 있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총체성 속에서, 바로 기득권집단의 이익이라는 단일한 지평 위에서 조직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슈들에 대해 온갖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결국 '소수의 탐욕의 지평' 대 '공공성의 지평'간의 대결이다.
공공성이라는 합리성이 강자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 인간애의 이념이 탐욕의 이념에 승리할 수 있을까?
원문 출처 :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1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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