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영화프로그램에서 김창완과 이동진(맞나?)이 나와서 영화 속에 나온 미국과
야구와의 관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야구에 대한 느낌, 사랑,
애착 등을 다룬 게 많았으니까.
그 중에서 한 영화를 따로 특별히 보고 싶어서 구글을 조사해봤는데...
구글의 능력에 대단한 경이를 표한다. '양아버지'와 '베이브 루스' 두 단어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프로그램이 사실은 아래의 분석기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게 해줬으니까.
이 멋진 분석을 쓴 사람과 구글의 검색능력에 경이를 표하면서...
미국영화속의 야구
조영정 (중앙대 첨단영상전문대학원 영상예술학과 박사)
아마도 야구만큼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이
가장 자신하는 두 가지-야구와 영화-가 만난 때문일지 모른다. 미국이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야구의 역사는 미국의 근대사와
함께 하며 미국인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로 오랫동안 각광받아왔다. 야구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한가지 설은 1839년 에브너 더블데이(Abner Doubleday) 장군이
쿠퍼스타운에서 야구를 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것은 물론 거짓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현재 야구 명예의 전당은 이 설에서 주장하는 야구의 발생지인 쿠퍼스타운에
건립되었다. 후에 야구의 창시자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로 합의되어지고 1938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카트라이트는 다이아몬드(야구 경기장의 모습)를
디자인한 사람으로 최초의 야구팀인 닉커보커(Knickerboker)팀의 창립자로서 1846년
최초의 공인 야구 경기를 갖기도 하였다. 1869년에 최초의 프로구단이 결성되어
경기를 펼치기 시작했으니 미국에 영화바람이 불때는 야구는 이미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해 관객을 끌어모으는데
주력하던 미국영화가 야구를 기록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래서
야구영화의 역사는 무성영화에서 시작한다. (이중에는 전설적인 야구스타 베이브
루스가 출연한 무성영화도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야구영화는 어림잡아 약 100편
정도에 이르고있으니 일년에 약 한편정도가 꾸준히 만들어져 온 셈이다.
그 수가 많은 만큼이나 야구영화는 다른 스포츠 영화(미식축구, 권투, 육상,
피겨스케이팅, 레슬링, 스키, 그리고 봅슬레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영화들이
있다)보다 다양하다. 물론 야구영화와 다른 스포츠 영화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일 것이다.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것은 물론 위대한 스포츠 선수의 일대기와 성공담은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의
중심 소재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화뿐만이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라도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선보인다. 대부분이 결국은 스포츠를 행하는 선수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야구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야구영화는 단순히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다루지 만은 않는다. 야구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관전자, 야구팬, 선수의 친구, 단순한 일반인 등, 야구장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점은 야구영화를 보다 낭만적으로
만들고 다양하게 만들고 결국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보편성을 갖게
한다. 그래서 야구영화의 장르는 성장영화, 스릴러, 멜로드라마, 심지어 뮤지컬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보편성은 늘 야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과 깊이 연관되어있다. 주인공이
비록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야구 이야기는 영웅과 함께 하거나 야구의 역사와
함께 한다. 그 역사가 찬란한 것이든 오염된 것이든 상관없이 그 역사는 개인의 삶
속에 각인 되고 야구의 위대함은 그 기억을-특히 그것이 오염된 역사일 경우에는-
정화시킨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위대함은 사실 미국적인 관점에서의 위대함이다.
이 위대함은 신화에 대한 믿음이며 순수함에 대한 믿음이다. 야구는 오랜 세월동안
미국 문화에 있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야구를 비판하지
못한다. 부패한 제도, 탐욕스러운 구단주, 매수된 선수, 잔인한 감독은 있을 수
있어도 야구자체는 늘 순수하다. 야구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은 결국 미국의 마지막
신념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싸이먼과 가펑클이 그들의 노래 <로빈슨 부인 Mrs.
Robinson>에서 "이 나라가 당신을 간절히 찾고 있는 이때에, 조 디마지오, 당신은
어디로 가버렸나요?"라며 한탄했을 때 세상이 떠들썩했던 이유도 그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듀엣은 조 디마지오의 퇴장과 더불어 야구에 있어서, 크게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순수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싸이먼과 가펑클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영화만큼은 야구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야구는 끊임없이 미국의 꿈과 신념, 그 순수의 시절을 이야기한다.
야구영화의 가장 커다란 특징인, 향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웅
다른 스포츠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구에 있어서도 '영웅'은 중심이 되는 소재이다.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과 같은 전설적인 야구선수는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실존인물들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극적인 요소를 갖춘 실존 인물들은 모두
야구영화가 사랑하는 영웅들이다. 영웅이 부재한 미국 근대사에 스포츠 영웅들은 미국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리적인 개척시대가 끝난 이후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워주는 이들이었다. 이런 스포츠 영웅들중에는 물론 도덕적인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명예스러운 인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야구영웅은 명예스러운 영웅들이다. 미국영화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선수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뉴욕 양키즈의 루 게릭의 이야기를 다룬 <양키의 자랑Pride of the
Yankees>(1942), 세인트루이스 카디날즈의 강속구 투수 디지 딘을 다룬
<세인트루이스의 자랑 Pride of St. Louis>(1952), 보스턴 레드삭스의 짐 피어셀의
이야기를 다룬(1958)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 잠시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을 때 베이브 루스를 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타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투수이기도 했던 글자 그대로 타고난
야구천재였다. 그는 양키즈에서 명성을 날릴 때 직접 출연한 무성영화와 루 게릭의
전기 영화인에 직접 출연할 정도로 영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영화계는 그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를 그리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8년에 만들어진가 엄연히 있다. 그러나 이
전기영화는 너무나도 심하게 왜곡되어 전기영화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
영화속의 베이브 루스는 전혀 실존인물과 닮아있지 않다. 착하고 정의롭게
미화되어있다. 물론 이 영화도 그의 전설적인 예고홈런을 담고 있지만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빌린 싸구려 동화라 할만하다. 베이브 루스는 여러면에서 루 게릭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괴팍하고 술고래였으며 여색을 밝혔고 훈련을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는 양키즈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스타였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였으며 반항아였다. 경력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베이브 루스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더욱 심하였고 결국 양키즈에서 방출되어 마이너리그에서 뛰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베이브 루스는 전설적인 야구영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루 게릭은 할리우드가 원하는
영웅상이었다. '철인(철마)'이라고 불리워졌던 루 게릭은 소문난 연습벌레였고 루
게릭과 함께 양키즈의 전성기를 이끈 강타자였다. 가정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유지하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근육이 굳어가는 불치병(이제 이병은 루
게릭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으로 은퇴한 후 죽어갔을 때 그는 '양키의 자랑'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당시 가장 모범적인 미국인 상을 대표하던 게리 쿠퍼야말로
루 게릭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베이브 The Babe>(1992, 아서 힐러 Arthur Hiller)는 베이브 루스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접근한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소년원으로 보내진
어린 루스는 그곳에서 수도사로부터 야구를 배운다. 마타이아스 신부는 "30년간
기다려온 기적"이라고 루스를 표현한다. 그는 19세에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에 입단한
후 보스턴 레드 삭스로 옮겨가지만 루스의 후견인이 파산함에 따라 그는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된다. 언젠가 감독이 될 것을 꿈꾸는 루스는 최초의 내야홈런을
때리는 등의 신기록을 세우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가족의 불화를 겪으면서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결국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방출된 루스는 3연속 홈런을 때린 날
은퇴한다.
일생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베이브 루스의 인생은
평탄치 못하다. 평생을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콤플렉스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 이 야구천재의 삶은 그래서 누구보다도 고독한 삶을
살게된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는자를 투쟁으로 맞서나간다. 자신의 강타자자리를
놓고 위협해오는 루 게릭에게 보이는 저항감은 이러한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루스를 이해하지 못했던 첫 번째 아내 헬렌과는 달리 두 번째 아내 클레어는 루스의
꿈과 공포를 이해한다. 그러나 간신히 찾은 가정적인 안정은 감독의 꿈이 좌절되면서
그로 하여금 명예롭지 못한 마지막을 장식하게 한다.
베이브 루스는 당시에도 기적과 같은 천재선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찾아보기 힘든
천재선수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과 전설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게 만들지만
그의 삶을 숨겨버린다. 할리우드는 그에 대한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기를 그가
죽고난지 40년이 훨씬 지난후에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베이브 루스를
3연타석 홈런을 날린 전설적인 순간에 퇴장시킨다. 복도 끝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걸어나가는 루스의 뒷모습에서 영웅에 대해 끊임없이 열망하는 미국인의 꿈이 보인다.
영화에서 원하는 영웅은 루 게릭 형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야망 Bang the
Drum Slowly>(1972, 존 D. 행콕 John D. Hancock)은 그런면에서 이상적인 영웅상을
그리고 있다. 정의롭고, 능력있고, 희생적인 인물상인 헨리는 할리우드가 꿈꾸는
이상형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실존인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우드가
원하는 야구인을 집약해 놓을 수 있다. 야구영화라기보다는 휴먼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이 영화는 야구라는 스포츠와 우정을 중심으로 놓고 있다. 이 영화는 스타 투수인
헨리와 그의 파트너인 포수 브루스 사이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2) 불치병을 앓고있는
브루스를 돕기위해 자신의 경력을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헨리의 모습은
야구영화가 꿈꾸는 이상적인 영웅상이지만 동시에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야구영웅들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의 동력은
야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헨리의 동기는 다르다. 그는 야구가 프로스포츠로
존재함으로써 갖게되는 상업성을 이미 체험하였고 그 매카니즘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타성을 이용해 친구를 보호한다. 그는 팬을 위해 봉사하지도 않고 어린이의
꿈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지도 않는다. 그는 선수의 능력이 떨어지면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는 프로스포츠의 냉정함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는 선수생활에 모든 것을 목을
매는 야구인도 아니다. 그는 동료 선수를 상대로 보험을 판다. 그러나 헨리가 맞서
싸우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스포츠 세계뿐만이 아니다. 죽어 가는
브루스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브루스의 애인과 그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 병으로 인해 사고능력을 상실해 가는 브루스의 고집은 물론 고통과도 전쟁을
치뤄내야만한다. 바로 이런 면이 이 영화가 단순히 상업주의에 물든 프로스포츠를
질타하는 비판영화에서 한발 벗어나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결국 삶에 대항해서
싸운다. 그 싸움이 이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치열한 전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야구' 자체이다. 무엇이 헨리를 희생적인 인물로 만드는가.
그는 왜 브루스를 도와주는가. 이 문제는 단순히 브루스가 죽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해 브루스가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헨리의 죄책감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브루스는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첫 대사가 '나는 이
인간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라고 시작한다. 브루스는 싱크대에 소변을 보고, 질겅질겅
씹는담배를 씹어대고, 그의 타율만큼이나 머리도 좋지 않다. 브루스도 헨리도, 영화
속의 어느 누구도 '야구를 사랑해'하는 따위의 낭만적인 대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적어도 브루스에게 있어서 야구가 삶이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야구를 빼면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야구를 통해서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팀 동료가 된다. 비극은 건강할 때 누리지 못했던 전성기를 죽음을
앞두고 누린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 헐뜯느라고 정신이 없어 경기를 이기지 못하던 이
야구팀은 브루스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브루스의
죽음을 통해 살아난다. 아마도 헨리 또한 그 어느 시즌보다도 힘차게 공을 던졌을
것이다. 치르는 경기 하나하나, 던지는 공 하나하나, 때리는 안타 하나하나가 연봉과
연결되는 프로야구세계에서 야구를 즐기는 것은 힘들다. 그들은 즐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 연봉협상이 해결되지 않은 헨리가 관중석에
서있으면서 자신이 보험을 판 동료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친구는 떠나기 전 헨리에게
충고 한마디를 던진다. '협상에서 이기고싶으면 여기 서있지마. 경기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면 이미 덜미를 잡힌거지.'
야구를 삶 자체로 알고 살아온 그들에게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죽음인
것이다. 헨리의 모든 노력과 희생은 브루스로 하여금 야구를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
발생된 것이다. 모든 야구영화의 주인공들은 야구가 삶이라고 말한다. <대야망>은
'야구가 삶'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죽음과 대치시켜놓고 그 명제를 어느
야구영화보다 깊고 절실하게 탐구하고 있는 야구영화라 할 수 있다. 3)
성장/ 가족/ 아버지
야구는 가족 스포츠이다.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야구장이 가족석을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가족에 대한 배려는 특별하다. 이것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다른 어떤 집단
스포츠에 비해 폭력성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몸싸움이 거의 없는
야구는 -몸싸움 자체가 진루방해 혹은 송구방해라는 반칙으로 규정되어 있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스포츠의 신사도 정신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가르치는
교과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부모와 함께 한나절을 보내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굿바이 뉴욕, 안녕 내사랑 City Slickers>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인 빌리 크리스탈은 결혼식 날과 아이의 탄생을 제외한 가장 행복한 날로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양키즈 구장을 찾은 날을 꼽고 있다. 흑백 텔레비젼 시절
흑백의 구장만을 보던 소년에게 통로의 끝에서 만난 녹색의 잔디와 파란 하늘은 글자
그대로 경이의 순간이었으며, 그 순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완벽해진다.
가족과 함께 즐기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야구는 그래서 영화 속에서 늘
소년의 성장기의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잡으며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붕괴된 가족을
복원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징적인 요소를 통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꿈의 구장
Field of Dreams>(Phil Alden Robinson, 1989)이다. 대학시절 만난 아내와 막연한
농부의 꿈을 안고 아이오와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던 레이 킨셀라는 어느 날 옥수수
밭에서 "그것을 지으면, 그가 올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야구장'을 지으면 '슈레스 조 잭슨'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레이는 옥수수 밭을
갈아 야구장을 짓는다. 경제적인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계속되는 목소리와
신비로운 계시 속에서 야구장을 지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화이트 삭스
스캔들'에 연루된 선수들의 일종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레이의
생각과는 달리 영화의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아버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낸다. 결국 목소리가 의미한 것은 '야구장을 지으면 아버지가 올
것이다'라는 계시였던 것이다. 조 잭슨과 같은 야구의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을 최고의
선수로 생각하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는 '어리석은' 말과 함께 집을 나온 레이의
회한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찾고자 하는 잠재의식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옥수수 밭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은 포수가 마스크를 벗고 지는 저녁
노을 속에 서있을 때, 그는 그 젊은이가 바로 자신감에 넘치는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된다. 젊은 아버지와 공을 주고받으며 그는 오랜 세월 그를 괴롭히던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루어 낸다. 아이오와라는 고립된 곳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농사를
지으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회의를 느끼던 레이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야구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붕괴된 가족을 복원하고 현재의 가족 내에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새천년을 눈앞에 두고 개봉된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 For Love of the
Game>(1999, 샘 레이미 Sam Raimi)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은퇴를
눈앞에 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노장투수인 빌리 채플은 시즌 마지막 경기를 눈앞에
두고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오래전
싸우고 헤어진 제인과의 재회이다. 그러나 밤새도록 기다린 제인은 오지 않고 이른
아침 그를 찾아온 것은 구단주였다. 구단을 팔기로 결심한 그는 빌리에게 방출의
수모를 겪기보다는 은퇴할 것을 권유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뒤늦게 나타난 제인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런던으로 갈 것을 통보하고, 경기장으로 간 빌리에게 감독은
오랜 파트너이며 친구인 포수 거스를 교체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꼬여버린
마지막 경기, 빌리는 거스를 고집하고 마운드에 오른다. 공 하나 하나를 던질때마다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제인과의 첫만남, 첫말다툼, 제인에게 10대
딸이 있다는 사실, 행복했던 시절, 손가락 부상으로 인한 절망, 제인과의 결별,
그리고 재회 등 야구에 모든 것을 바쳐온 자신의 삶에 제인이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편 그의 기억과 더불어 그의 현실은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 게임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고 있었다.
빌리 채플은 고전적인 야구 영웅이다. 영화의 처음에 펼쳐지듯이 그 역시 다른 모든
야구 선수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문과 방송, 잡지를 통해 보여지는
빌리의 야구선수로서의 일대기는 홈무비를 통해 보여지는 아버지와의 추억과
겹쳐진다.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 아름답게 낭만적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뿌옇고
빛바랜 과거는 경기장면의 선명하고 정확하게 맞춰진 포커스속에서 잊혀져 간다.
빌리는 구단을 자신의 가족으로 삼고 살아왔다. 포수인 거스는 어떤 혈연관계보다도
가까운 가족이었다. 높은 연봉보다는 구단의 구성원으로써 살아왔고, 스포츠의 위상에
관심을 보였던 빌리는 구단주의 말처럼 '고전시대'의 영웅이다. 모든 것이 순수했던
시절, 야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던 시절. <사랑을 위하여>는 그래서 빌리의
가족찾기이다. 여기서 샘 레이미는 매우 위험스러운 제안을 한다. 야구가 약속하는
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그런 순수의 시대는 끝났음을
알린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의 9회말은 중요하다. 9회말을 남겨놓고 빌리는 구단주에게
자신의 진로를 적은 야구공을 보낸다. '나는 그만 둘 것입니다. 이 게임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라는 문구는 모든 것을 집약한다. 9회말이 진행되면서 빌리는 드디어
마지막 타자를 맞이한다. 너무 젊어서 자신의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도 모르고, 이
순간이 얼마나 두려운 순간인지도 모르는 어린 선수 앞에서 그는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속했던 고전시대의 마지막을 대면한 순간이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집중력도
사라지고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도 허사로 돌아간 이 시점
그는 경기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마지막과 더불어 '순수했던 야구'의 마지막을 본다.
그는 완벽한 게임을 이루어내지만, 결국 완벽해질 수 없다. 빌리가 퍼펙트 게임의
위업을 이루고도 침대 끝에 앉아 오열을 터뜨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구가
약속했던 꿈과 희망, 순수는 퍼펙트 게임을 이룩한 그 '완벽한'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빌리는 그 완벽함을 찾아 제인에게로 간다. 가족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야구의 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야구를 떠나서만이 가능해진다.
이런 면에서 <꿈의 구장>과 <사랑을 위하여>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출발한 이 두영화의 가족찾기는 아들없는 가정으로 귀착된다. 면면히 이어온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꿈의 구장>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꿈을
이해하고 아버지로부터 야구의 역사를 전수받지만 야구글러브를 전수받지 못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꿈의 구장에서 공을 주고 받을 때 그의 어린 딸은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운동장밖으로 밀려난다. <사랑을 위하여>의 헤더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빌리와 제인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완벽한 가정을 이루기위한 결정적인 요소이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관전하는 야구
바깥의 인물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전수되던 야구의 꿈은 그래서 더 이상 갈곳을
잃는다. 그래서 전수되지 못한 야구는 영화속에서 추억으로 남는다.
음모
야구장의 건설을 통해 부자관계와 가족의 가치를 복원하고 있는 <꿈의 구장>이
복원하고 있는 또 하나는 야구에 대한 꿈이다. 1919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 대
신시내티 레즈의 월드 시리즈 승부 조작 사건인 '화이트 삭스 스캔들(일명 블랙 삭스
스캔들)'은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남아있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구단주 코미스키는 선수들을 착취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며 어느 누구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의심치 않았던 화이트 삭스팀의 선수들은
어느 팀보다도 열악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아놀드 '치크' 갠딜(1루수)의
주도하에 시카티(투수), 리즈버그(유격수), 프레드 맥멀린(3루수),
클로드‘레프티’윌리엄스(투수), 조 잭슨(외야수), 조지‘버크' 위버(3루수), 오스카
'해피' 펠시(외야수) 등 모두 8명의 선수들은 조작 경기에 가담하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침체된 야구를 되살리기 위해 9차전으로 진행된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는 3승
5패로 패배한다. 그러나 이 스캔들은 다음해에 이르러서야 밝혀지게 되고 21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재판이 열린다. 이들이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선수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야구에 누를 끼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비밀리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는 한
국민적 오락(야구)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거나 야구산업에 해를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4)라는 변호사의 설득력 없어 보이는 주장은 의외로 판사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은 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러한 판결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치 어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희생자를 살해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목을 잘랐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 같았다" 5)라고 피력할 정도로
판결에는 문제가 많았다. 이에 초대 커미셔너로 추대된 랜디스 대법원장은 8명의
선수를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시킴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사건을 빠르게 일단락 짓고 그런 추한 사건은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고 싶었던
야구계의 바램에서 한발 더 나아가 <꿈의 구장>은 이 사건이 그리 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구단주의 횡포만 아니었다면 발생되지 않았을 사건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여덟 명의 선수들은 사실 무죄의 다른 시카고 선수들보다 더 커다란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 영화의 주장이다. (물론 영화는 '슈레스 조'의 활약상을 더욱
강조한다.) 시카고의 제명된 선수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실추된 야구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명예를 되살리고 짓밟힌 꿈을 되살리는 힘은 무엇일까?
야구 영화에서 제시하는 치료의 묘약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다. <꿈의 구장>이
발표되기 일년 전에 발표된 <여덟 명의 제명된 남자들 Eight Men Out>(John Sayles,
1988)은 화이트 삭스 스캔들을 가장 사실에 근접하게 묘사한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만큼 주류 영화의 거대한 '야구'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 추악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영구 제명된 조 잭슨은 이름을 바꾸고 마이너리그에서 야구
선수 생활을 계속한다. 제명 따위가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타를 치고 베이스에 나간 조 잭슨은 모자를 벗고 환호하는 관중에
답하면서 하늘을 본다. 그의 얼굴에 비극의 흔적은 없다. 오로지 야구에 대한
사랑만이 배어 있을 뿐이다.
<내츄럴>의 가장 커다란 이야기 축은 조작 경기이다. 조 잭슨과 마찬가지로
외야수이며 강타자인 로이 홉스의 이야기는 '화이트 삭스 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이미 이 글의 처음에서 밝혔듯이 홉스는 조작 경기에 가담하지 않으며 가담한 투수를
설득해 팀을 승리로 이끈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와 총격 상처의 재발로 선수로는
생명이 끝난 홉스가 돈 봉투를 거부할 수 있었던 힘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모든
기록을 다시 쓰겠다던' 그의 꿈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나는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실존 인물인 조 잭슨이나 허구의 인물인
로이 홉스가 공유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관객/ 야구팬의 '야구에 대한 사랑/
신념'과 맞물려 있다. '야구에 대한 사랑'은 허상이다. 이것은 마치 신화 속의 낙원과
같다. 모든 것을 치유하며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약속된 땅과 같다. 이 허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미국인이 지키고 싶은 마지막 신념이다.
향수
나는 야구 역사의 모든 기록을 다시 쓰고 싶었어. 내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나면
사람들이 내가 길을 갈 때 이렇게 말할 거야. '저기 로이 홉스가 간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간다.'
<내츄럴>에서 로이 홉스의 대사.
야구를 흔히 기록경기라고 한다. 그것은 일단은 야구가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통계수치에 따라 결정되는 지점이 많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가령 박찬호는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다. 야구가 기록경기라고
불리는 다른 중요한 이유는 야구만큼 '기록'에 연연해하는 스포츠가 드물기 때문이다.
경기의 핵심이 되는 투수가 던지는 공, 타자가 공격하는 공 하나 하나는 물론이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가 빠지지 않고 기록된다. 공식적으로 특정 선수가 한
행동이 정상적인 플레이였는지 실수였는지를 밝히고 따지는 경기는 아마도 또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야구만큼 책임소재가 분명한 스포츠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 이렇게 기록과 관련된 농담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여주인공 제인 옆에
연착으로 야구 경기를 보게 된 것이 즐겁다는 한 남자는 등 번호 1번부터 99번까지의
모든 양키즈 선수 이름을 댈 수 있다고 자랑하며 1번부터 차례차례 외우기 시작한다.
물론 제인은 이를 제재한다. <굿바이 뉴욕, 안녕 내 사랑>에서 소몰이를 나갔던
일행이 점심을 먹기 위해 모였을 때 여성 일행이 무작위로 연도와 시리즈, 포지션을
대자, 남자 셋은 동시에 선수의 이름을 대며 서로 자신이 먼저 말했다고 다투는
장면이 있다. 이렇듯 기록은 실제로 경기를 펼치는 선수와 그 주변에 있는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의 존재와 공유는 결국 야구가 갖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단지 야구가 현대 스포츠 중 가장 오래된 프로페셔널 리그를 가지고 있다는
길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야구영화가 갖는 이 특별한 과거 지향적
성격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기록 중심의 야구 담론은 결국 야구가 과거를 기점으로
구성된 스포츠임을 이야기한다. 기록은 기억되기 위한 주문과도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선수에 대한 기록을 암기하는 것은 기억하기 위한 제의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경기, 과거의 선수는 부활한다.에서 옛날
신문을 펼쳐놓고 야구 기사를 읽는 멀더를 스컬리가 비아냥거리자 멀더는 기록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그는 야구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 경기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면서 이 작은 숫자들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이 기록의 힘은 영화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야구영화는
과거로 가기를 좋아한다. 승부를 결정지었던 공 하나는 영원히 전설처럼 남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로 회귀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현재의 기록은 과거의
기록을 되살리며 동시에 과거의 기록은 현재를 자극한다.
야구영화는 가장 순수한 스포츠, 야구를 매개체로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간다.
야구영화중에 어린이가 등장하는 성장 가족 영화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성장영화와는 달리 주인공들은 야구라는 사건을 통해 인생사를 배워 가지는
않는다. 야구는 늘 치료제이다. 가족이 겪는 균열과 결손은 야구를 통해 메워진다.
<우리 아빠 야호>의 스티브 마틴의 '아들이 공하나를 잡는 것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수있다'는 대사는 야구가 갖는 치유능력을 완벽하게 대변해준다.
이런 면에서 데이빗 M. 에반스 David M. Evans의 <리틀 야구왕 The Sandlot>(1993)은
좋은 예가 된다. 내성적인 성격의 스캇 스몰스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양아버지를 맞게
되지만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만은 않다. 야구에 대한 상식도 없고 운동신경이 둔한
스카티는 야구팬인 새아버지에게 그리 '꿈에 그리던 아들'은 아니었다. 동네 야구
대장인 로드리구에즈의 도움으로 야구를 배우게 된 스카티는 소년들이 매일같이
이야기하는 '위대한 밤비노'가 누군지도 모른다. 정규야구팀을 뭉개버리고 아름다운
수상안전요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 모험을 펼치는 이들에게도 한가지 공포의 대상이
있다. 이것은 공터를 둘러싼 담장너머의 '야수'이다. 아이하나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앞에 소년들이 공이 넘어가도 다시 가져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일생
일대의 사건이 터진다. 스캇이 집에서 가져온 공이 담장을 넘어간 것이다. 담장
너머에 있는 '야수'에게 야구공을 상납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공은
다르다. 공에 서명된 이름이 여자라고 꿋꿋이 믿고있던 스카티의 생각과는 달리
'베이브 루스'가 바로 전설적인 '위대한 밤비노'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성장영화가
그러하듯 이 소년들도 공을 회수하면서 인생이 숨기고 있는 '공포'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야구와 접목되면서 이 성장과정은 완벽한 가정을 이루어내는데 일조한다.
망가진 '베이브 루스' 야구공 대신에 '야수'의 주인으로부터 얻은 베이브 루스 시절의
양키즈 전원의 사인 공(루 게릭을 포함한)은 스카티와 양아버지와의 관계에 결속력을
가져온다. 동네 야구에서 다져진 스카티의 야구실력은 아들과의 공주고 받기를 꿈꾸던
아버지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변화구를 던지는 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비로소 '꿈에
그리던 아들'을 얻고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와 더불어 완벽한 가정은
복원된다.
그러나 <리틀 야구왕>은 단순한 가족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본질은 사실 과거와
현재의 만남, 기록과 전설에 대한 찬가라는 측면에 있다. 영화는 이제 어른이 된 스캇
스몰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932년 월드시리즈, 베이브 루스는 마지막 타석에서
운동장 중앙을 향해 야구배트를 향한다. 그리고 예고된 방향으로 장쾌한 홈런을
날린다. '그는 이미 영웅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전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는 스캇의
목소리는 곧이어 30년 후 발생한 또하나의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바로 벤자민
플랭클린 로드리구에즈의 전설이다. 야구를 기록하고 야구 중계 아나운서라는 스캇의
직업은 야구의 역사를 되살리며 전설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온갖
별명과 함께 야구계의 전설이 된 베이브 루스와 새로운 신화에 도전하는 베니
로드리구에즈의 유년시절을 쫓아가는 이 영화에서 베이브 루스는 의미심장하다.
야구단의 휘장과 트로피로 장식된 마치 야구의 전당과 같은 서재를 가진 새아버지가
특히 애지중지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베이브 루스의 사인볼이다. 이
야구공은 단순히 공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며 아버지의 유산이며 미국정신의
결정체이다. 이 공은 놀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과거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는 그 신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스캇은 이러한 신화에 무지하다. 그는 베이브 루스가 누구인지 모른다.
신화를 모르는 스캇에게 그 공은 놀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되는 놀이기구일
뿐이다. 단지 그 공이 새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혼날 것이 두려울 뿐이다. 신화를
공유하는 다른 소년들에게 그 공은 더 이상 유희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 공은 갖고
놀 수 있는 공이 아니다. 그것이 신화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공포를 이겨내게 한다. 담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던
소년들은 이제 담장을 떠나지 못한다. 야수의 신음소리하나에도 질겁을 하던 소년들은
그 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낼 만큼 배짱을 보인다. 그들은 시련앞에 목숨을 거는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역경과 맞서 싸운다. 이 모든 것은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 하나로
가능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직 베니만이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야구를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소년과는 달리 야구를 삶이라고 믿고 있는 베니는 베이브
루스의 신화에 가장 가까이 가있는 소년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베이브 루스는 그의 꿈에 나타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위대한 일을 할 단
한번의 기회를 갖게된다. 단지 그 기회를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
뿐이다.'라는 베이브 루스의 말은 어린 베니에게 용기를 준다. '영웅은 기억될
뿐이지만 전설은 영원히 살아 숨쉰다. 네 마음이 명하는 데로 따른다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계장치를 동원해 야수와 대적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난 후 베니는 비장의 무기인 새운동화를 신고 담장을 넘어 비수와 정면
대결한다. 정면대결을 통해 공포를 극복한 베니는 이제 전설의 주인공이 되며
'제트기'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야수'와의 대적 끝에 그들은 야수의 주인을 만난다.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머틀씨는
야수의 전설속의 광폭한 주인이 아니라 시력을 잃고 은퇴한 왕년의 흑인
야구선수였다. 다 뜯겨진 야구공을 손에 든 베니와 스캇을 집안으로 들인 그는 소년이
곤경에 처한 것을 직감하지만 그 망가진 공이 베이브 루스의 싸인볼인 것을 아는 순간
소년에게 "넌 죽은 목숨이다"라고 말할만큼 신화를 이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년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와 야구 이야기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1928년 양키즈
선수들이 모두 싸인한 공을 준다. 물론 이 공에는 베이브 루스는 물론 루게릭의
사인도 포함되어있다. 시력을 잃은 머틀씨의 방은 마치 야구 박물관과 같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도 볼 수 없지만 야구의 신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한다. 그는 역사 속에 남아있는 영웅도 아니었고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운명을 머리로 날아온 공 하나로 잃어버렸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신화 속의 한
부분이었고 그 자체로 삶의 이유가 된다. 새로운 세대와의 만남, 전설의 전수, 그것은
가치를 계산할수 없는 야구공만큼 값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스캇의 중계석의 한 켠은 야구의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는
베이브 루스의 전설이 있고, 비운의 영웅 머틀씨의 전설이 있고, 베니 '제트기'
로드리구에즈의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공터'에서 보낸
여름이 영원히 숨쉬고 있는 것이다.
<리틀 야구왕>이 우리를 스캇이라는 중개자를 통해 과거의 신화속으로 안내한다면
<내츄럴 The Natural>(1984, 베리 레빈슨 Barry Levinson)은 우리를 과거 자체로
안내한다. <내츄럴>은 로이 홉스라는 야구천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야구를 배운 소년 로이는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던 날 번개를 맞아
갈라진 나무로 야구 배트를 만들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운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the
natural)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구단의 테스트를 제의 받는다. 사랑하는 여인
아이리스를 고향에 두고 길을 떠난 로이는 그러나 시카고로 가던 중 만난 신비에 쌓인
여인 헤리어트로부터 총격을 받는다. 그로부터 16년후 구단을 손에 넣기 위해 무명의
선수만을 스카우트하는 구단주의 눈에 뛴 로이 홉스는 뉴욕 나이츠팀에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구단주의 기대와는 달리 로이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패배 일로에 있던
구단을 시리즈 우승의 문턱에 다가서게 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구단주는 스포츠 전문
도박사와 힘을 합쳐 미모의 여성 메모를 이용해 음모를 꾀하고 로이는 시리즈 우승을
눈앞에 두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구단주의 돈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서게 하고 마지막 역전 홈런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다.
<내츄럴>은 1952년에 출간된 버나드 말라머드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원작은
야구의 낭만성에 1949년에 실제로 발생했던 야구선수 저격사건 6)과 화이트 삭스
스캔들을 섞어놓은 야구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의 마지막은 로이가
구단주에게 매수당해 경기를 일부러 지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이트 삭스가 조작
경기를 했을 때 외야에 있던 어린 소년이 슈레스 조 잭슨(화이트 삭스의 외야수이며
스캔들에 관련되어 영구 제명된)에게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조"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차용해 경기장을 나가는 로이에게 소년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로이"라고 외치며
종결된다. 그러나 소설이 영화화 될 때 주연을 맡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요구로 마지막
장면은 수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대스타가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고자 한 권력 남용의 예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야구의 신화를 오염시키지
않으려는 영화계의 반응이라고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내츄럴>은 완벽하게 재현된 세트와 의상을 통해 우리를 30년대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베이브 루스를 재현한 홈런왕 웨머를 만나고, 선수들을 착취하는 구단주와
기사거리를 찾기위해 선수들의 안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신문기자 맥스를 만난다.
이들은 모두 30년의 겉옷을 입고 있지만 스타선수와 구단을 비롯한 경제적 이해집단,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삼파전을 벌이는 현재의 프로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이해관계를 초월한 영웅 로이
홉스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베이브 루스같은 타고난 천재이며 루 게릭같은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슈레스 조 잭슨처럼 조작경기에는 휩쓸리지 않을 인물인 것이다. 그는 완벽한 야구
영웅상을 재현한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야구에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관중에게는 환호의 순간을 제공하는 순수 시대의 영웅인 것이다. 그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선수이며 야구에 모든 정열을 바치며 미국인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미국인의 영웅이다. <내츄럴> 또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부합한다. 로이 홉스의 야구에 대한 꿈은 아버지와 직결되어 있다.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훌륭한 선수는 꾸준히 연습해야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의 야구에
대한 성실함과 끝없는 애정을 환기시킨다. 자신의 옛애인인 아이리스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녀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게된다. 이제 아버지가 필요한 나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아버지는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Father makes a difference)'라고
대답한다. 영화 속에서 판사의 음모로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뉴욕 나이츠의
감독은 늘 입버릇처럼 자신의 어머니가 늘 자기에게 농부가 되라고 하셨다고 말한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야구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나 짓겠다던 그에게 로이 홉스는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야구를 하라고 하셨지요.'라고 말한다.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실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이상과 만나면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현실의 무미건조한 지속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진취적인 아버지의 가르침 앞에
초라하기만 하다.
영화 속에서 로이 홉스는 아버지의 꿈을 계승하는 훌륭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들에게
꿈을 전수하는 아버지이다. 아이리스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기 전에도 홉스의
이미지는 늘 아버지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뉴스 화면에서 어린이들에 둘러쌓인
그의 모습과 더불어 팀내의 뱃보이 사보이와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설정된다. 선수들이
뒤켠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사보이는 홉스의 활약과 더불어 팀의 마스코트로 떠오른다.
홉스의 '원더보이' 야구 방망이를 부러워하는 소년에게 같이 야구방망이를 만들 것을
제안하고, 원정 경기 속에서도 소년의 숙제를 챙기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원더보이'가 부러지고 '사보이 스페셜'로 마지막
결승 홈런을 날리는 홉스의 모습은 이러한 세대를 이어가는 부자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 마지막 홈런타구의 이미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실제
부자간(홉스와 아이리스의 아들)의 공 주고받기로 연결된다. 오랜 야구의 신화 만들기
끝에 홉스가 안주한 곳은 가정이다. 아이리스의 따뜻한 시선 속에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아들과 공을 주고받는 모습은 영화의 처음에 소개된 아버지의 죽음을
부활시키고 영화 내내 함축적으로 진행되어온 결손 가족을 복원시킨다.
<내츄럴>의 가장 커다란 이야기 축은 조작 경기이다. 조 잭슨과 마찬가지로
외야수이며 강타자인 로이 홉스의 이야기는 '화이트 삭스 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조작 경기에 가담하지 않으며 가담한 투수를 설득해 팀을 승리로
이끈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와 총격 상처의 재발로 선수로는 생명이 끝난 홉스가 돈
봉투를 거부할 수 있었던 힘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모든 기록을 다시 쓰겠다던'
그의 꿈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나는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실존 인물인 조 잭슨이나 허구의 인물인 로이 홉스가 공유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관객/ 야구팬의 '야구에 대한 사랑/ 신념'과 맞물려 있다. 영화속에서
재현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허상이다. 이것은 마치 신화 속의 낙원과 같다. 모든
것을 치유하며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약속된 땅과 같다. 이 허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미국인이 지키고 싶은 마지막 신념이다. 이러한 허구적인
신념은 그래서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 못한다. 과거라는 배경은 이러한 허구성을
향수라는 정서속에 은폐시킨다.
야구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야구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휴머니즘'일 것이다. 야구는
미국인이 잃어 가는, 혹은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마지막
양심, 마지막 꿈, 마지막 신념. 그 모든 마지막의 교두보이다. 이런 면에서 새천년에
개봉된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는 의미가 있다.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
게임을 이뤄가는 노장 투수를 그린 이 영화 역시 영화의 역사와 낭만과 꿈을
이야기하지만, 이제 그것이 모두 끝났음을 이야기한다. 재정난으로 야구단을
넘겨야하는 구단주가 마지막 게임일지도 모르는 경기를 앞둔 주인공에게 찾아온다.
이제는 은퇴해야할 시점이라고, 더 이상 옛날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이 게임은
구질구질해졌다(this game stinks.)고 말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노장
투수는 단호하게 덧붙인다. "사람이 구질구질하고 세상이 구질구질 해졌을 뿐, 게임은
절대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애매하게 붙인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은 사실 반만 번역한 것이다. 원제인은 지금까지의 모든
야구영화에, 야구에 대한 모든 사랑을 향해 이 영화를 헌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에서 야구를 다루고 있는 "Unnatral" 에피소드로 돌아가 보자.
멀더는 50년대 초 신문의 야구기사 면에서 발견된 경찰관을 찾아간다. 경찰관은
마이너리그에서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깬 흑인 선수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기사화 되기를 꺼리고 그래서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도 포기한 이 흑인선수는 당시
암살 협박을 받고 있었고 이 경찰관은 이 선수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결국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이 야구 선수는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고 야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조직에서 도망쳐 남부에서 흑인선수로 활동한 것이다. 조직에서 파견된
외계인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진 선수 앞에 경찰관이 뒤늦게 도착한다.
그의 몸에서 마땅히 흘러나와야 할 독극성의 초록색 피 대신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야구에 대한 사랑은 그를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야구가 우주계의 질서를 바꿀 정도로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이 에피소드의 환상성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단지
미국인의 야구사랑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에서 정의한
야구란 무엇인가는 야구에 대한 모든 것을 종합해준다. 어두운 버스에서 이
흑인선수는 경찰관에게 외계인인 자신이 어떻게 야구선수가 되었는지를 설명한 후
야구에 대해 설명한다. "야구는 너무도 쓸모 없고 불필요하며 가치 없는 것이지요.
마치 장미처럼... 그래서 너무 완벽합니다." (mailto:fonzie@unitel.co.kr)
조 디마지오가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디마지오는 순수와 의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노인과 소년사이의 디마지오에 대한 대화는 노인의 처절한 싸움에서도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영화의 첫장면의 크레딧에서 '포수 브루스 피어스 역에 로버트
드니로' '투수 헨리 위겐 역에 마이클 모리아티'라고 포지션을 적어 놓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미지 자체가 평화로운 야구의 꿈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야구를 통한
우정임을 분명히 해준다. 물론 포수와 투수가 야구의 핵심 파트너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영화의 원제인 'Bang the Drum Slowly'는 영화속에서도 나오는 노래의
제목이다. 이 노래는 카우보이노래인데 젊은 카우보이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야구와 카우보이가 가장 미국적인 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속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청년은 브루스의 죽음을 구단이 알게되면서 마이너에서 다시 불러들인
선수이다. 브루스의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이트 삭스 스캔들'에 관련된 정보와 당시 투수였던 시카티의 변호사인 벤 쇼티의
변론의 인용은 인터넷 www.yagoo114.com의 자료를 이용하였음. 인용출처:
www.yagoo114.com/yagoo114/contents/ml_comedy/sox/sox7.htm 각주 2)와 같음. 1949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1루수 에디 웨이커스는 팬임을 자청하는 19세의
타이피스트로부터 총격을 당한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스 스타이하겐이라는 이
여성은 웨이커스를 자신의 호텔 방으로 초대한 후 오른쪽 가슴에 총을 쏜다. 영화에서
헤리어트는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선수만을 골라 은제 총알로 살해한다.
그녀는 아직 데뷔하지 않은 로이 홉스가 당시의 최고의 강타자(베이브 루스를 모델로
한) 웨머를 내기에서 삼진 시키는 것을 목격한 후 그를 야구의 희생자로 선택한다.
실제에서 스타이하겐이 경찰에 체포된 것과는 달리 헤리어트는 총격 후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야구와의 관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야구에 대한 느낌, 사랑,
애착 등을 다룬 게 많았으니까.
그 중에서 한 영화를 따로 특별히 보고 싶어서 구글을 조사해봤는데...
구글의 능력에 대단한 경이를 표한다. '양아버지'와 '베이브 루스' 두 단어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프로그램이 사실은 아래의 분석기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게 해줬으니까.
이 멋진 분석을 쓴 사람과 구글의 검색능력에 경이를 표하면서...
미국영화속의 야구
조영정 (중앙대 첨단영상전문대학원 영상예술학과 박사)
아마도 야구만큼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이
가장 자신하는 두 가지-야구와 영화-가 만난 때문일지 모른다. 미국이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야구의 역사는 미국의 근대사와
함께 하며 미국인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로 오랫동안 각광받아왔다. 야구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한가지 설은 1839년 에브너 더블데이(Abner Doubleday) 장군이
쿠퍼스타운에서 야구를 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것은 물론 거짓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현재 야구 명예의 전당은 이 설에서 주장하는 야구의 발생지인 쿠퍼스타운에
건립되었다. 후에 야구의 창시자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로 합의되어지고 1938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카트라이트는 다이아몬드(야구 경기장의 모습)를
디자인한 사람으로 최초의 야구팀인 닉커보커(Knickerboker)팀의 창립자로서 1846년
최초의 공인 야구 경기를 갖기도 하였다. 1869년에 최초의 프로구단이 결성되어
경기를 펼치기 시작했으니 미국에 영화바람이 불때는 야구는 이미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해 관객을 끌어모으는데
주력하던 미국영화가 야구를 기록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래서
야구영화의 역사는 무성영화에서 시작한다. (이중에는 전설적인 야구스타 베이브
루스가 출연한 무성영화도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야구영화는 어림잡아 약 100편
정도에 이르고있으니 일년에 약 한편정도가 꾸준히 만들어져 온 셈이다.
그 수가 많은 만큼이나 야구영화는 다른 스포츠 영화(미식축구, 권투, 육상,
피겨스케이팅, 레슬링, 스키, 그리고 봅슬레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영화들이
있다)보다 다양하다. 물론 야구영화와 다른 스포츠 영화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일 것이다.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것은 물론 위대한 스포츠 선수의 일대기와 성공담은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의
중심 소재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화뿐만이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라도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선보인다. 대부분이 결국은 스포츠를 행하는 선수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야구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야구영화는 단순히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다루지 만은 않는다. 야구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관전자, 야구팬, 선수의 친구, 단순한 일반인 등, 야구장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점은 야구영화를 보다 낭만적으로
만들고 다양하게 만들고 결국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보편성을 갖게
한다. 그래서 야구영화의 장르는 성장영화, 스릴러, 멜로드라마, 심지어 뮤지컬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보편성은 늘 야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과 깊이 연관되어있다. 주인공이
비록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야구 이야기는 영웅과 함께 하거나 야구의 역사와
함께 한다. 그 역사가 찬란한 것이든 오염된 것이든 상관없이 그 역사는 개인의 삶
속에 각인 되고 야구의 위대함은 그 기억을-특히 그것이 오염된 역사일 경우에는-
정화시킨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위대함은 사실 미국적인 관점에서의 위대함이다.
이 위대함은 신화에 대한 믿음이며 순수함에 대한 믿음이다. 야구는 오랜 세월동안
미국 문화에 있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야구를 비판하지
못한다. 부패한 제도, 탐욕스러운 구단주, 매수된 선수, 잔인한 감독은 있을 수
있어도 야구자체는 늘 순수하다. 야구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은 결국 미국의 마지막
신념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싸이먼과 가펑클이 그들의 노래 <로빈슨 부인 Mrs.
Robinson>에서 "이 나라가 당신을 간절히 찾고 있는 이때에, 조 디마지오, 당신은
어디로 가버렸나요?"라며 한탄했을 때 세상이 떠들썩했던 이유도 그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듀엣은 조 디마지오의 퇴장과 더불어 야구에 있어서, 크게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순수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싸이먼과 가펑클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영화만큼은 야구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야구는 끊임없이 미국의 꿈과 신념, 그 순수의 시절을 이야기한다.
야구영화의 가장 커다란 특징인, 향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웅
다른 스포츠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구에 있어서도 '영웅'은 중심이 되는 소재이다.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과 같은 전설적인 야구선수는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실존인물들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극적인 요소를 갖춘 실존 인물들은 모두
야구영화가 사랑하는 영웅들이다. 영웅이 부재한 미국 근대사에 스포츠 영웅들은 미국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리적인 개척시대가 끝난 이후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워주는 이들이었다. 이런 스포츠 영웅들중에는 물론 도덕적인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명예스러운 인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야구영웅은 명예스러운 영웅들이다. 미국영화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선수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뉴욕 양키즈의 루 게릭의 이야기를 다룬 <양키의 자랑Pride of the
Yankees>(1942), 세인트루이스 카디날즈의 강속구 투수 디지 딘을 다룬
<세인트루이스의 자랑 Pride of St. Louis>(1952), 보스턴 레드삭스의 짐 피어셀의
이야기를 다룬
여기서 잠시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을 때 베이브 루스를 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타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투수이기도 했던 글자 그대로 타고난
야구천재였다. 그는 양키즈에서 명성을 날릴 때 직접 출연한 무성영화와 루 게릭의
전기 영화인
영화계는 그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를 그리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8년에 만들어진
전기영화는 너무나도 심하게 왜곡되어 전기영화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
영화속의 베이브 루스는 전혀 실존인물과 닮아있지 않다. 착하고 정의롭게
미화되어있다. 물론 이 영화도 그의 전설적인 예고홈런을 담고 있지만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빌린 싸구려 동화라 할만하다. 베이브 루스는 여러면에서 루 게릭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괴팍하고 술고래였으며 여색을 밝혔고 훈련을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는 양키즈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스타였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였으며 반항아였다. 경력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베이브 루스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더욱 심하였고 결국 양키즈에서 방출되어 마이너리그에서 뛰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베이브 루스는 전설적인 야구영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루 게릭은 할리우드가 원하는
영웅상이었다. '철인(철마)'이라고 불리워졌던 루 게릭은 소문난 연습벌레였고 루
게릭과 함께 양키즈의 전성기를 이끈 강타자였다. 가정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유지하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근육이 굳어가는 불치병(이제 이병은 루
게릭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으로 은퇴한 후 죽어갔을 때 그는 '양키의 자랑'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당시 가장 모범적인 미국인 상을 대표하던 게리 쿠퍼야말로
루 게릭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베이브 The Babe>(1992, 아서 힐러 Arthur Hiller)는 베이브 루스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접근한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소년원으로 보내진
어린 루스는 그곳에서 수도사로부터 야구를 배운다. 마타이아스 신부는 "30년간
기다려온 기적"이라고 루스를 표현한다. 그는 19세에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에 입단한
후 보스턴 레드 삭스로 옮겨가지만 루스의 후견인이 파산함에 따라 그는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된다. 언젠가 감독이 될 것을 꿈꾸는 루스는 최초의 내야홈런을
때리는 등의 신기록을 세우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가족의 불화를 겪으면서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한다. 결국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방출된 루스는 3연속 홈런을 때린 날
은퇴한다.
일생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베이브 루스의 인생은
평탄치 못하다. 평생을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콤플렉스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 이 야구천재의 삶은 그래서 누구보다도 고독한 삶을
살게된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는자를 투쟁으로 맞서나간다. 자신의 강타자자리를
놓고 위협해오는 루 게릭에게 보이는 저항감은 이러한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루스를 이해하지 못했던 첫 번째 아내 헬렌과는 달리 두 번째 아내 클레어는 루스의
꿈과 공포를 이해한다. 그러나 간신히 찾은 가정적인 안정은 감독의 꿈이 좌절되면서
그로 하여금 명예롭지 못한 마지막을 장식하게 한다.
베이브 루스는 당시에도 기적과 같은 천재선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찾아보기 힘든
천재선수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과 전설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게 만들지만
그의 삶을 숨겨버린다. 할리우드는 그에 대한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기를 그가
죽고난지 40년이 훨씬 지난후에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베이브 루스를
3연타석 홈런을 날린 전설적인 순간에 퇴장시킨다. 복도 끝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걸어나가는 루스의 뒷모습에서 영웅에 대해 끊임없이 열망하는 미국인의 꿈이 보인다.
영화에서 원하는 영웅은 루 게릭 형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야망 Bang the
Drum Slowly>(1972, 존 D. 행콕 John D. Hancock)은 그런면에서 이상적인 영웅상을
그리고 있다. 정의롭고, 능력있고, 희생적인 인물상인 헨리는 할리우드가 꿈꾸는
이상형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실존인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우드가
원하는 야구인을 집약해 놓을 수 있다. 야구영화라기보다는 휴먼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이 영화는 야구라는 스포츠와 우정을 중심으로 놓고 있다. 이 영화는 스타 투수인
헨리와 그의 파트너인 포수 브루스 사이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2) 불치병을 앓고있는
브루스를 돕기위해 자신의 경력을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헨리의 모습은
야구영화가 꿈꾸는 이상적인 영웅상이지만 동시에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야구영웅들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의 동력은
야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헨리의 동기는 다르다. 그는 야구가 프로스포츠로
존재함으로써 갖게되는 상업성을 이미 체험하였고 그 매카니즘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타성을 이용해 친구를 보호한다. 그는 팬을 위해 봉사하지도 않고 어린이의
꿈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지도 않는다. 그는 선수의 능력이 떨어지면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는 프로스포츠의 냉정함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는 선수생활에 모든 것을 목을
매는 야구인도 아니다. 그는 동료 선수를 상대로 보험을 판다. 그러나 헨리가 맞서
싸우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스포츠 세계뿐만이 아니다. 죽어 가는
브루스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브루스의 애인과 그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 병으로 인해 사고능력을 상실해 가는 브루스의 고집은 물론 고통과도 전쟁을
치뤄내야만한다. 바로 이런 면이 이 영화가 단순히 상업주의에 물든 프로스포츠를
질타하는 비판영화에서 한발 벗어나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결국 삶에 대항해서
싸운다. 그 싸움이 이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치열한 전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야구' 자체이다. 무엇이 헨리를 희생적인 인물로 만드는가.
그는 왜 브루스를 도와주는가. 이 문제는 단순히 브루스가 죽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해 브루스가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헨리의 죄책감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브루스는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첫 대사가 '나는 이
인간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라고 시작한다. 브루스는 싱크대에 소변을 보고, 질겅질겅
씹는담배를 씹어대고, 그의 타율만큼이나 머리도 좋지 않다. 브루스도 헨리도, 영화
속의 어느 누구도 '야구를 사랑해'하는 따위의 낭만적인 대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적어도 브루스에게 있어서 야구가 삶이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야구를 빼면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야구를 통해서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팀 동료가 된다. 비극은 건강할 때 누리지 못했던 전성기를 죽음을
앞두고 누린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 헐뜯느라고 정신이 없어 경기를 이기지 못하던 이
야구팀은 브루스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브루스의
죽음을 통해 살아난다. 아마도 헨리 또한 그 어느 시즌보다도 힘차게 공을 던졌을
것이다. 치르는 경기 하나하나, 던지는 공 하나하나, 때리는 안타 하나하나가 연봉과
연결되는 프로야구세계에서 야구를 즐기는 것은 힘들다. 그들은 즐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 연봉협상이 해결되지 않은 헨리가 관중석에
서있으면서 자신이 보험을 판 동료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친구는 떠나기 전 헨리에게
충고 한마디를 던진다. '협상에서 이기고싶으면 여기 서있지마. 경기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면 이미 덜미를 잡힌거지.'
야구를 삶 자체로 알고 살아온 그들에게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죽음인
것이다. 헨리의 모든 노력과 희생은 브루스로 하여금 야구를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
발생된 것이다. 모든 야구영화의 주인공들은 야구가 삶이라고 말한다. <대야망>은
'야구가 삶'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죽음과 대치시켜놓고 그 명제를 어느
야구영화보다 깊고 절실하게 탐구하고 있는 야구영화라 할 수 있다. 3)
성장/ 가족/ 아버지
야구는 가족 스포츠이다.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야구장이 가족석을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가족에 대한 배려는 특별하다. 이것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다른 어떤 집단
스포츠에 비해 폭력성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몸싸움이 거의 없는
야구는 -몸싸움 자체가 진루방해 혹은 송구방해라는 반칙으로 규정되어 있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스포츠의 신사도 정신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가르치는
교과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부모와 함께 한나절을 보내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굿바이 뉴욕, 안녕 내사랑 City Slickers>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인 빌리 크리스탈은 결혼식 날과 아이의 탄생을 제외한 가장 행복한 날로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양키즈 구장을 찾은 날을 꼽고 있다. 흑백 텔레비젼 시절
흑백의 구장만을 보던 소년에게 통로의 끝에서 만난 녹색의 잔디와 파란 하늘은 글자
그대로 경이의 순간이었으며, 그 순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완벽해진다.
가족과 함께 즐기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야구는 그래서 영화 속에서 늘
소년의 성장기의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잡으며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붕괴된 가족을
복원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징적인 요소를 통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꿈의 구장
Field of Dreams>(Phil Alden Robinson, 1989)이다. 대학시절 만난 아내와 막연한
농부의 꿈을 안고 아이오와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던 레이 킨셀라는 어느 날 옥수수
밭에서 "그것을 지으면, 그가 올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야구장'을 지으면 '슈레스 조 잭슨'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레이는 옥수수 밭을
갈아 야구장을 짓는다. 경제적인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계속되는 목소리와
신비로운 계시 속에서 야구장을 지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화이트 삭스
스캔들'에 연루된 선수들의 일종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레이의
생각과는 달리 영화의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아버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낸다. 결국 목소리가 의미한 것은 '야구장을 지으면 아버지가 올
것이다'라는 계시였던 것이다. 조 잭슨과 같은 야구의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을 최고의
선수로 생각하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는 '어리석은' 말과 함께 집을 나온 레이의
회한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찾고자 하는 잠재의식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옥수수 밭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은 포수가 마스크를 벗고 지는 저녁
노을 속에 서있을 때, 그는 그 젊은이가 바로 자신감에 넘치는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된다. 젊은 아버지와 공을 주고받으며 그는 오랜 세월 그를 괴롭히던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루어 낸다. 아이오와라는 고립된 곳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농사를
지으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회의를 느끼던 레이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야구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붕괴된 가족을 복원하고 현재의 가족 내에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새천년을 눈앞에 두고 개봉된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 For Love of the
Game>(1999, 샘 레이미 Sam Raimi)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은퇴를
눈앞에 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노장투수인 빌리 채플은 시즌 마지막 경기를 눈앞에
두고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오래전
싸우고 헤어진 제인과의 재회이다. 그러나 밤새도록 기다린 제인은 오지 않고 이른
아침 그를 찾아온 것은 구단주였다. 구단을 팔기로 결심한 그는 빌리에게 방출의
수모를 겪기보다는 은퇴할 것을 권유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뒤늦게 나타난 제인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런던으로 갈 것을 통보하고, 경기장으로 간 빌리에게 감독은
오랜 파트너이며 친구인 포수 거스를 교체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꼬여버린
마지막 경기, 빌리는 거스를 고집하고 마운드에 오른다. 공 하나 하나를 던질때마다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제인과의 첫만남, 첫말다툼, 제인에게 10대
딸이 있다는 사실, 행복했던 시절, 손가락 부상으로 인한 절망, 제인과의 결별,
그리고 재회 등 야구에 모든 것을 바쳐온 자신의 삶에 제인이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편 그의 기억과 더불어 그의 현실은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 게임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고 있었다.
빌리 채플은 고전적인 야구 영웅이다. 영화의 처음에 펼쳐지듯이 그 역시 다른 모든
야구 선수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문과 방송, 잡지를 통해 보여지는
빌리의 야구선수로서의 일대기는 홈무비를 통해 보여지는 아버지와의 추억과
겹쳐진다.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 아름답게 낭만적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뿌옇고
빛바랜 과거는 경기장면의 선명하고 정확하게 맞춰진 포커스속에서 잊혀져 간다.
빌리는 구단을 자신의 가족으로 삼고 살아왔다. 포수인 거스는 어떤 혈연관계보다도
가까운 가족이었다. 높은 연봉보다는 구단의 구성원으로써 살아왔고, 스포츠의 위상에
관심을 보였던 빌리는 구단주의 말처럼 '고전시대'의 영웅이다. 모든 것이 순수했던
시절, 야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던 시절. <사랑을 위하여>는 그래서 빌리의
가족찾기이다. 여기서 샘 레이미는 매우 위험스러운 제안을 한다. 야구가 약속하는
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그런 순수의 시대는 끝났음을
알린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의 9회말은 중요하다. 9회말을 남겨놓고 빌리는 구단주에게
자신의 진로를 적은 야구공을 보낸다. '나는 그만 둘 것입니다. 이 게임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라는 문구는 모든 것을 집약한다. 9회말이 진행되면서 빌리는 드디어
마지막 타자를 맞이한다. 너무 젊어서 자신의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도 모르고, 이
순간이 얼마나 두려운 순간인지도 모르는 어린 선수 앞에서 그는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속했던 고전시대의 마지막을 대면한 순간이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집중력도
사라지고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도 허사로 돌아간 이 시점
그는 경기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마지막과 더불어 '순수했던 야구'의 마지막을 본다.
그는 완벽한 게임을 이루어내지만, 결국 완벽해질 수 없다. 빌리가 퍼펙트 게임의
위업을 이루고도 침대 끝에 앉아 오열을 터뜨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구가
약속했던 꿈과 희망, 순수는 퍼펙트 게임을 이룩한 그 '완벽한'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빌리는 그 완벽함을 찾아 제인에게로 간다. 가족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야구의 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야구를 떠나서만이 가능해진다.
이런 면에서 <꿈의 구장>과 <사랑을 위하여>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출발한 이 두영화의 가족찾기는 아들없는 가정으로 귀착된다. 면면히 이어온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꿈의 구장>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꿈을
이해하고 아버지로부터 야구의 역사를 전수받지만 야구글러브를 전수받지 못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꿈의 구장에서 공을 주고 받을 때 그의 어린 딸은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운동장밖으로 밀려난다. <사랑을 위하여>의 헤더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빌리와 제인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완벽한 가정을 이루기위한 결정적인 요소이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관전하는 야구
바깥의 인물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전수되던 야구의 꿈은 그래서 더 이상 갈곳을
잃는다. 그래서 전수되지 못한 야구는 영화속에서 추억으로 남는다.
음모
야구장의 건설을 통해 부자관계와 가족의 가치를 복원하고 있는 <꿈의 구장>이
복원하고 있는 또 하나는 야구에 대한 꿈이다. 1919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 대
신시내티 레즈의 월드 시리즈 승부 조작 사건인 '화이트 삭스 스캔들(일명 블랙 삭스
스캔들)'은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남아있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구단주 코미스키는 선수들을 착취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며 어느 누구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의심치 않았던 화이트 삭스팀의 선수들은
어느 팀보다도 열악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아놀드 '치크' 갠딜(1루수)의
주도하에 시카티(투수), 리즈버그(유격수), 프레드 맥멀린(3루수),
클로드‘레프티’윌리엄스(투수), 조 잭슨(외야수), 조지‘버크' 위버(3루수), 오스카
'해피' 펠시(외야수) 등 모두 8명의 선수들은 조작 경기에 가담하게 된다. 1차 대전
이후 침체된 야구를 되살리기 위해 9차전으로 진행된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는 3승
5패로 패배한다. 그러나 이 스캔들은 다음해에 이르러서야 밝혀지게 되고 21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재판이 열린다. 이들이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선수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야구에 누를 끼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비밀리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는 한
국민적 오락(야구)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거나 야구산업에 해를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4)라는 변호사의 설득력 없어 보이는 주장은 의외로 판사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은 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러한 판결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치 어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희생자를 살해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목을 잘랐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 같았다" 5)라고 피력할 정도로
판결에는 문제가 많았다. 이에 초대 커미셔너로 추대된 랜디스 대법원장은 8명의
선수를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시킴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사건을 빠르게 일단락 짓고 그런 추한 사건은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고 싶었던
야구계의 바램에서 한발 더 나아가 <꿈의 구장>은 이 사건이 그리 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구단주의 횡포만 아니었다면 발생되지 않았을 사건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여덟 명의 선수들은 사실 무죄의 다른 시카고 선수들보다 더 커다란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 영화의 주장이다. (물론 영화는 '슈레스 조'의 활약상을 더욱
강조한다.) 시카고의 제명된 선수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실추된 야구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명예를 되살리고 짓밟힌 꿈을 되살리는 힘은 무엇일까?
야구 영화에서 제시하는 치료의 묘약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다. <꿈의 구장>이
발표되기 일년 전에 발표된 <여덟 명의 제명된 남자들 Eight Men Out>(John Sayles,
1988)은 화이트 삭스 스캔들을 가장 사실에 근접하게 묘사한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만큼 주류 영화의 거대한 '야구'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 추악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영구 제명된 조 잭슨은 이름을 바꾸고 마이너리그에서 야구
선수 생활을 계속한다. 제명 따위가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타를 치고 베이스에 나간 조 잭슨은 모자를 벗고 환호하는 관중에
답하면서 하늘을 본다. 그의 얼굴에 비극의 흔적은 없다. 오로지 야구에 대한
사랑만이 배어 있을 뿐이다.
<내츄럴>의 가장 커다란 이야기 축은 조작 경기이다. 조 잭슨과 마찬가지로
외야수이며 강타자인 로이 홉스의 이야기는 '화이트 삭스 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이미 이 글의 처음에서 밝혔듯이 홉스는 조작 경기에 가담하지 않으며 가담한 투수를
설득해 팀을 승리로 이끈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와 총격 상처의 재발로 선수로는
생명이 끝난 홉스가 돈 봉투를 거부할 수 있었던 힘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모든
기록을 다시 쓰겠다던' 그의 꿈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나는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실존 인물인 조 잭슨이나 허구의 인물인
로이 홉스가 공유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관객/ 야구팬의 '야구에 대한 사랑/
신념'과 맞물려 있다. '야구에 대한 사랑'은 허상이다. 이것은 마치 신화 속의 낙원과
같다. 모든 것을 치유하며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약속된 땅과 같다. 이 허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미국인이 지키고 싶은 마지막 신념이다.
향수
나는 야구 역사의 모든 기록을 다시 쓰고 싶었어. 내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나면
사람들이 내가 길을 갈 때 이렇게 말할 거야. '저기 로이 홉스가 간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간다.'
<내츄럴>에서 로이 홉스의 대사.
야구를 흔히 기록경기라고 한다. 그것은 일단은 야구가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통계수치에 따라 결정되는 지점이 많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가령 박찬호는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다. 야구가 기록경기라고
불리는 다른 중요한 이유는 야구만큼 '기록'에 연연해하는 스포츠가 드물기 때문이다.
경기의 핵심이 되는 투수가 던지는 공, 타자가 공격하는 공 하나 하나는 물론이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가 빠지지 않고 기록된다. 공식적으로 특정 선수가 한
행동이 정상적인 플레이였는지 실수였는지를 밝히고 따지는 경기는 아마도 또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야구만큼 책임소재가 분명한 스포츠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 이렇게 기록과 관련된 농담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여주인공 제인 옆에
연착으로 야구 경기를 보게 된 것이 즐겁다는 한 남자는 등 번호 1번부터 99번까지의
모든 양키즈 선수 이름을 댈 수 있다고 자랑하며 1번부터 차례차례 외우기 시작한다.
물론 제인은 이를 제재한다. <굿바이 뉴욕, 안녕 내 사랑>에서 소몰이를 나갔던
일행이 점심을 먹기 위해 모였을 때 여성 일행이 무작위로 연도와 시리즈, 포지션을
대자, 남자 셋은 동시에 선수의 이름을 대며 서로 자신이 먼저 말했다고 다투는
장면이 있다. 이렇듯 기록은 실제로 경기를 펼치는 선수와 그 주변에 있는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의 존재와 공유는 결국 야구가 갖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단지 야구가 현대 스포츠 중 가장 오래된 프로페셔널 리그를 가지고 있다는
길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야구영화가 갖는 이 특별한 과거 지향적
성격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기록 중심의 야구 담론은 결국 야구가 과거를 기점으로
구성된 스포츠임을 이야기한다. 기록은 기억되기 위한 주문과도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선수에 대한 기록을 암기하는 것은 기억하기 위한 제의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경기, 과거의 선수는 부활한다.
신문을 펼쳐놓고 야구 기사를 읽는 멀더를 스컬리가 비아냥거리자 멀더는 기록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그는 야구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 경기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면서 이 작은 숫자들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이 기록의 힘은 영화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야구영화는
과거로 가기를 좋아한다. 승부를 결정지었던 공 하나는 영원히 전설처럼 남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로 회귀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현재의 기록은 과거의
기록을 되살리며 동시에 과거의 기록은 현재를 자극한다.
야구영화는 가장 순수한 스포츠, 야구를 매개체로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간다.
야구영화중에 어린이가 등장하는 성장 가족 영화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성장영화와는 달리 주인공들은 야구라는 사건을 통해 인생사를 배워 가지는
않는다. 야구는 늘 치료제이다. 가족이 겪는 균열과 결손은 야구를 통해 메워진다.
<우리 아빠 야호>의 스티브 마틴의 '아들이 공하나를 잡는 것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수있다'는 대사는 야구가 갖는 치유능력을 완벽하게 대변해준다.
이런 면에서 데이빗 M. 에반스 David M. Evans의 <리틀 야구왕 The Sandlot>(1993)은
좋은 예가 된다. 내성적인 성격의 스캇 스몰스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양아버지를 맞게
되지만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만은 않다. 야구에 대한 상식도 없고 운동신경이 둔한
스카티는 야구팬인 새아버지에게 그리 '꿈에 그리던 아들'은 아니었다. 동네 야구
대장인 로드리구에즈의 도움으로 야구를 배우게 된 스카티는 소년들이 매일같이
이야기하는 '위대한 밤비노'가 누군지도 모른다. 정규야구팀을 뭉개버리고 아름다운
수상안전요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 모험을 펼치는 이들에게도 한가지 공포의 대상이
있다. 이것은 공터를 둘러싼 담장너머의 '야수'이다. 아이하나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앞에 소년들이 공이 넘어가도 다시 가져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일생
일대의 사건이 터진다. 스캇이 집에서 가져온 공이 담장을 넘어간 것이다. 담장
너머에 있는 '야수'에게 야구공을 상납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공은
다르다. 공에 서명된 이름이 여자라고 꿋꿋이 믿고있던 스카티의 생각과는 달리
'베이브 루스'가 바로 전설적인 '위대한 밤비노'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성장영화가
그러하듯 이 소년들도 공을 회수하면서 인생이 숨기고 있는 '공포'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야구와 접목되면서 이 성장과정은 완벽한 가정을 이루어내는데 일조한다.
망가진 '베이브 루스' 야구공 대신에 '야수'의 주인으로부터 얻은 베이브 루스 시절의
양키즈 전원의 사인 공(루 게릭을 포함한)은 스카티와 양아버지와의 관계에 결속력을
가져온다. 동네 야구에서 다져진 스카티의 야구실력은 아들과의 공주고 받기를 꿈꾸던
아버지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변화구를 던지는 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비로소 '꿈에
그리던 아들'을 얻고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와 더불어 완벽한 가정은
복원된다.
그러나 <리틀 야구왕>은 단순한 가족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본질은 사실 과거와
현재의 만남, 기록과 전설에 대한 찬가라는 측면에 있다. 영화는 이제 어른이 된 스캇
스몰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932년 월드시리즈, 베이브 루스는 마지막 타석에서
운동장 중앙을 향해 야구배트를 향한다. 그리고 예고된 방향으로 장쾌한 홈런을
날린다. '그는 이미 영웅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전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는 스캇의
목소리는 곧이어 30년 후 발생한 또하나의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바로 벤자민
플랭클린 로드리구에즈의 전설이다. 야구를 기록하고 야구 중계 아나운서라는 스캇의
직업은 야구의 역사를 되살리며 전설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온갖
별명과 함께 야구계의 전설이 된 베이브 루스와 새로운 신화에 도전하는 베니
로드리구에즈의 유년시절을 쫓아가는 이 영화에서 베이브 루스는 의미심장하다.
야구단의 휘장과 트로피로 장식된 마치 야구의 전당과 같은 서재를 가진 새아버지가
특히 애지중지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베이브 루스의 사인볼이다. 이
야구공은 단순히 공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며 아버지의 유산이며 미국정신의
결정체이다. 이 공은 놀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과거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는 그 신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스캇은 이러한 신화에 무지하다. 그는 베이브 루스가 누구인지 모른다.
신화를 모르는 스캇에게 그 공은 놀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되는 놀이기구일
뿐이다. 단지 그 공이 새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혼날 것이 두려울 뿐이다. 신화를
공유하는 다른 소년들에게 그 공은 더 이상 유희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 공은 갖고
놀 수 있는 공이 아니다. 그것이 신화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공포를 이겨내게 한다. 담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던
소년들은 이제 담장을 떠나지 못한다. 야수의 신음소리하나에도 질겁을 하던 소년들은
그 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낼 만큼 배짱을 보인다. 그들은 시련앞에 목숨을 거는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역경과 맞서 싸운다. 이 모든 것은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 하나로
가능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직 베니만이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야구를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소년과는 달리 야구를 삶이라고 믿고 있는 베니는 베이브
루스의 신화에 가장 가까이 가있는 소년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베이브 루스는 그의 꿈에 나타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위대한 일을 할 단
한번의 기회를 갖게된다. 단지 그 기회를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
뿐이다.'라는 베이브 루스의 말은 어린 베니에게 용기를 준다. '영웅은 기억될
뿐이지만 전설은 영원히 살아 숨쉰다. 네 마음이 명하는 데로 따른다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계장치를 동원해 야수와 대적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난 후 베니는 비장의 무기인 새운동화를 신고 담장을 넘어 비수와 정면
대결한다. 정면대결을 통해 공포를 극복한 베니는 이제 전설의 주인공이 되며
'제트기'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야수'와의 대적 끝에 그들은 야수의 주인을 만난다.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머틀씨는
야수의 전설속의 광폭한 주인이 아니라 시력을 잃고 은퇴한 왕년의 흑인
야구선수였다. 다 뜯겨진 야구공을 손에 든 베니와 스캇을 집안으로 들인 그는 소년이
곤경에 처한 것을 직감하지만 그 망가진 공이 베이브 루스의 싸인볼인 것을 아는 순간
소년에게 "넌 죽은 목숨이다"라고 말할만큼 신화를 이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년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와 야구 이야기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1928년 양키즈
선수들이 모두 싸인한 공을 준다. 물론 이 공에는 베이브 루스는 물론 루게릭의
사인도 포함되어있다. 시력을 잃은 머틀씨의 방은 마치 야구 박물관과 같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도 볼 수 없지만 야구의 신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한다. 그는 역사 속에 남아있는 영웅도 아니었고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운명을 머리로 날아온 공 하나로 잃어버렸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신화 속의 한
부분이었고 그 자체로 삶의 이유가 된다. 새로운 세대와의 만남, 전설의 전수, 그것은
가치를 계산할수 없는 야구공만큼 값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스캇의 중계석의 한 켠은 야구의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는
베이브 루스의 전설이 있고, 비운의 영웅 머틀씨의 전설이 있고, 베니 '제트기'
로드리구에즈의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공터'에서 보낸
여름이 영원히 숨쉬고 있는 것이다.
<리틀 야구왕>이 우리를 스캇이라는 중개자를 통해 과거의 신화속으로 안내한다면
<내츄럴 The Natural>(1984, 베리 레빈슨 Barry Levinson)은 우리를 과거 자체로
안내한다. <내츄럴>은 로이 홉스라는 야구천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야구를 배운 소년 로이는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던 날 번개를 맞아
갈라진 나무로 야구 배트를 만들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운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the
natural)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구단의 테스트를 제의 받는다. 사랑하는 여인
아이리스를 고향에 두고 길을 떠난 로이는 그러나 시카고로 가던 중 만난 신비에 쌓인
여인 헤리어트로부터 총격을 받는다. 그로부터 16년후 구단을 손에 넣기 위해 무명의
선수만을 스카우트하는 구단주의 눈에 뛴 로이 홉스는 뉴욕 나이츠팀에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구단주의 기대와는 달리 로이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패배 일로에 있던
구단을 시리즈 우승의 문턱에 다가서게 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구단주는 스포츠 전문
도박사와 힘을 합쳐 미모의 여성 메모를 이용해 음모를 꾀하고 로이는 시리즈 우승을
눈앞에 두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구단주의 돈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서게 하고 마지막 역전 홈런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다.
<내츄럴>은 1952년에 출간된 버나드 말라머드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원작은
야구의 낭만성에 1949년에 실제로 발생했던 야구선수 저격사건 6)과 화이트 삭스
스캔들을 섞어놓은 야구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의 마지막은 로이가
구단주에게 매수당해 경기를 일부러 지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이트 삭스가 조작
경기를 했을 때 외야에 있던 어린 소년이 슈레스 조 잭슨(화이트 삭스의 외야수이며
스캔들에 관련되어 영구 제명된)에게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조"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차용해 경기장을 나가는 로이에게 소년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로이"라고 외치며
종결된다. 그러나 소설이 영화화 될 때 주연을 맡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요구로 마지막
장면은 수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대스타가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고자 한 권력 남용의 예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야구의 신화를 오염시키지
않으려는 영화계의 반응이라고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내츄럴>은 완벽하게 재현된 세트와 의상을 통해 우리를 30년대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베이브 루스를 재현한 홈런왕 웨머를 만나고, 선수들을 착취하는 구단주와
기사거리를 찾기위해 선수들의 안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신문기자 맥스를 만난다.
이들은 모두 30년의 겉옷을 입고 있지만 스타선수와 구단을 비롯한 경제적 이해집단,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삼파전을 벌이는 현재의 프로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이해관계를 초월한 영웅 로이
홉스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베이브 루스같은 타고난 천재이며 루 게릭같은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슈레스 조 잭슨처럼 조작경기에는 휩쓸리지 않을 인물인 것이다. 그는 완벽한 야구
영웅상을 재현한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야구에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관중에게는 환호의 순간을 제공하는 순수 시대의 영웅인 것이다. 그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선수이며 야구에 모든 정열을 바치며 미국인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미국인의 영웅이다. <내츄럴> 또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부합한다. 로이 홉스의 야구에 대한 꿈은 아버지와 직결되어 있다.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훌륭한 선수는 꾸준히 연습해야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의 야구에
대한 성실함과 끝없는 애정을 환기시킨다. 자신의 옛애인인 아이리스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녀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게된다. 이제 아버지가 필요한 나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아버지는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Father makes a difference)'라고
대답한다. 영화 속에서 판사의 음모로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뉴욕 나이츠의
감독은 늘 입버릇처럼 자신의 어머니가 늘 자기에게 농부가 되라고 하셨다고 말한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야구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나 짓겠다던 그에게 로이 홉스는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야구를 하라고 하셨지요.'라고 말한다.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실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이상과 만나면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현실의 무미건조한 지속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진취적인 아버지의 가르침 앞에
초라하기만 하다.
영화 속에서 로이 홉스는 아버지의 꿈을 계승하는 훌륭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들에게
꿈을 전수하는 아버지이다. 아이리스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기 전에도 홉스의
이미지는 늘 아버지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뉴스 화면에서 어린이들에 둘러쌓인
그의 모습과 더불어 팀내의 뱃보이 사보이와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설정된다. 선수들이
뒤켠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사보이는 홉스의 활약과 더불어 팀의 마스코트로 떠오른다.
홉스의 '원더보이' 야구 방망이를 부러워하는 소년에게 같이 야구방망이를 만들 것을
제안하고, 원정 경기 속에서도 소년의 숙제를 챙기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원더보이'가 부러지고 '사보이 스페셜'로 마지막
결승 홈런을 날리는 홉스의 모습은 이러한 세대를 이어가는 부자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 마지막 홈런타구의 이미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실제
부자간(홉스와 아이리스의 아들)의 공 주고받기로 연결된다. 오랜 야구의 신화 만들기
끝에 홉스가 안주한 곳은 가정이다. 아이리스의 따뜻한 시선 속에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아들과 공을 주고받는 모습은 영화의 처음에 소개된 아버지의 죽음을
부활시키고 영화 내내 함축적으로 진행되어온 결손 가족을 복원시킨다.
<내츄럴>의 가장 커다란 이야기 축은 조작 경기이다. 조 잭슨과 마찬가지로
외야수이며 강타자인 로이 홉스의 이야기는 '화이트 삭스 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조작 경기에 가담하지 않으며 가담한 투수를 설득해 팀을 승리로
이끈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와 총격 상처의 재발로 선수로는 생명이 끝난 홉스가 돈
봉투를 거부할 수 있었던 힘은 야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모든 기록을 다시 쓰겠다던'
그의 꿈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나는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실존 인물인 조 잭슨이나 허구의 인물인 로이 홉스가 공유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관객/ 야구팬의 '야구에 대한 사랑/ 신념'과 맞물려 있다. 영화속에서
재현되는 '야구에 대한 사랑'은 허상이다. 이것은 마치 신화 속의 낙원과 같다. 모든
것을 치유하며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약속된 땅과 같다. 이 허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미국인이 지키고 싶은 마지막 신념이다. 이러한 허구적인
신념은 그래서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 못한다. 과거라는 배경은 이러한 허구성을
향수라는 정서속에 은폐시킨다.
야구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야구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휴머니즘'일 것이다. 야구는
미국인이 잃어 가는, 혹은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마지막
양심, 마지막 꿈, 마지막 신념. 그 모든 마지막의 교두보이다. 이런 면에서 새천년에
개봉된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는 의미가 있다.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
게임을 이뤄가는 노장 투수를 그린 이 영화 역시 영화의 역사와 낭만과 꿈을
이야기하지만, 이제 그것이 모두 끝났음을 이야기한다. 재정난으로 야구단을
넘겨야하는 구단주가 마지막 게임일지도 모르는 경기를 앞둔 주인공에게 찾아온다.
이제는 은퇴해야할 시점이라고, 더 이상 옛날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이 게임은
구질구질해졌다(this game stinks.)고 말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노장
투수는 단호하게 덧붙인다. "사람이 구질구질하고 세상이 구질구질 해졌을 뿐, 게임은
절대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애매하게 붙인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은 사실 반만 번역한 것이다. 원제인
야구영화에, 야구에 대한 모든 사랑을 향해 이 영화를 헌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멀더는 50년대 초 신문의 야구기사 면에서 발견된 경찰관을 찾아간다. 경찰관은
마이너리그에서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깬 흑인 선수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기사화 되기를 꺼리고 그래서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도 포기한 이 흑인선수는 당시
암살 협박을 받고 있었고 이 경찰관은 이 선수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결국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이 야구 선수는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고 야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조직에서 도망쳐 남부에서 흑인선수로 활동한 것이다. 조직에서 파견된
외계인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진 선수 앞에 경찰관이 뒤늦게 도착한다.
그의 몸에서 마땅히 흘러나와야 할 독극성의 초록색 피 대신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야구에 대한 사랑은 그를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야구가 우주계의 질서를 바꿀 정도로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이 에피소드의 환상성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단지
미국인의 야구사랑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에서 정의한
야구란 무엇인가는 야구에 대한 모든 것을 종합해준다. 어두운 버스에서 이
흑인선수는 경찰관에게 외계인인 자신이 어떻게 야구선수가 되었는지를 설명한 후
야구에 대해 설명한다. "야구는 너무도 쓸모 없고 불필요하며 가치 없는 것이지요.
마치 장미처럼... 그래서 너무 완벽합니다." (mailto:fonzie@unitel.co.kr)
조 디마지오가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디마지오는 순수와 의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노인과 소년사이의 디마지오에 대한 대화는 노인의 처절한 싸움에서도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영화의 첫장면의 크레딧에서 '포수 브루스 피어스 역에 로버트
드니로' '투수 헨리 위겐 역에 마이클 모리아티'라고 포지션을 적어 놓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미지 자체가 평화로운 야구의 꿈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야구를 통한
우정임을 분명히 해준다. 물론 포수와 투수가 야구의 핵심 파트너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영화의 원제인 'Bang the Drum Slowly'는 영화속에서도 나오는 노래의
제목이다. 이 노래는 카우보이노래인데 젊은 카우보이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야구와 카우보이가 가장 미국적인 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속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청년은 브루스의 죽음을 구단이 알게되면서 마이너에서 다시 불러들인
선수이다. 브루스의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이트 삭스 스캔들'에 관련된 정보와 당시 투수였던 시카티의 변호사인 벤 쇼티의
변론의 인용은 인터넷 www.yagoo114.com의 자료를 이용하였음. 인용출처:
www.yagoo114.com/yagoo114/contents/ml_comedy/sox/sox7.htm 각주 2)와 같음. 1949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1루수 에디 웨이커스는 팬임을 자청하는 19세의
타이피스트로부터 총격을 당한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스 스타이하겐이라는 이
여성은 웨이커스를 자신의 호텔 방으로 초대한 후 오른쪽 가슴에 총을 쏜다. 영화에서
헤리어트는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선수만을 골라 은제 총알로 살해한다.
그녀는 아직 데뷔하지 않은 로이 홉스가 당시의 최고의 강타자(베이브 루스를 모델로
한) 웨머를 내기에서 삼진 시키는 것을 목격한 후 그를 야구의 희생자로 선택한다.
실제에서 스타이하겐이 경찰에 체포된 것과는 달리 헤리어트는 총격 후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