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챌 지식검색에서 퍼왔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당시 최고의 선수로 우승이 당연시
되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구단주의 인색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도박사들과
공모하여 고의로 져주기 게임을 한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야구계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야구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들 뻔했다. 후에 베이브루스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기 전까지 메이져리그는 오랜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사건으로
메이져리그 전체의 판관인 커미셔너 제도가 만들어졌다.
1876년 NL가 창설된 후 ML는 몇 차례의 고비를 겪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비롯된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 1981년과 1994년의 파업사태, 2001년의 테러사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19년 월드시리즈만큼 ML의 존립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사건은 없었다. 1919년 월드시리즈는 ML 역사상 최악의 사태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리즈였다. `Fall Classic history` 그 4번째 시간, 오늘은 ML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했던 사건이 벌어진 1919년 월드시리즈를 살펴보겠다.
1915년 이후 월드시리즈의 흥행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당시의 최강팀은 AL의 보스턴
레드삭스였는데 떠오르는 별 베이브 루스(Babe Ruth)가 투타에서 맹활약한 보스턴은
1915, 1916,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AL는 1917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NL 우승팀인 존 맥그로우(John McGraw)의 뉴욕 자이언츠를
물리쳐 1915년부터 1918년까지 4년 연속으로 NL를 제압하며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19년 시즌, AL의 우승팀은 재작년에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였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베이브 루스가
타격의 모델로 삼았다는 전설적인 타격왕 `맨발의` 조 잭슨(`Shoeless` Joe
Jackson), 명 2루수 에디 콜린스(Eddie Collins), 권투선수 출신의 명 1루수 치크
갠딜(Chick Gandil) 등이 이끄는 막강타선과 에디 시카티(Eddie Cicotte), 클라우드
`레프티` 윌리엄스(Claude "Lefty" Williams)의 막강 원투펀치가 마운드를 지키는
최강팀이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화이트삭스가 NL 챔피언인
신시내티 레즈를 무난히 물리치고 월드시리즈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벌어진 1919년 월드시리즈는 이전과 달리 9전
5선승제로 치러졌다. 구단주들이 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경기 수를 늘린
것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시리즈는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화이트삭스 팀이 고의로 시리즈를 패배하려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전은 10월 1일(미국시간)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인 크로스레이
필드(Crosley Field)에서 벌어졌는데, 레즈의 선발투수는 더치 로이터
(Dutch Ruether), 화이트삭스의 선발은 시카티였다. 마운드의 무게에서는
정규시즌 19승의 로이터는 시카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마운드의 시카티는 시작부터 이상하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4회까지 무려 6점을 실점하며 강판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레즈의 9-1 승리로 끝났고, 시카티의 이해할 수 없는 무기력한 피칭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의패배의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2차전에서도 시즌 중 23승을 거둔 선발 `레프티` 윌리엄스가 사사구를
남발하며 화이트삭스가 4-2로 패배하자 의심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경기가
끝난 후 지난 2경기에서 최선을 다했던 화이트삭스 포수 레이 쇼크(Ray Schalk)가
윌리엄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을 정도였다.
3차전은 10월 3일 화이트삭스의 홈인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에서 벌어졌다.
아직까지 고의패배의 소문을 알지 못하는 화이트삭스 팬들은 홈구장에서 벌어지는
3차전에서 그들이 응원하는 팀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비록
1, 2차전에서 연패하긴 했지만 화이트삭스 타선은 레즈보다 더 많은 안타를 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상대로 화이트삭스는 선발 딕키 커(Dickie Kerr)의 완봉
역투로 3-0으로 승리했다. 커는 시즌 중 겨우 13승에 그쳐 1, 2차전 선발이었던
시카티나 윌리엄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둔 젊은 좌완투수였는데,
그런 그가 레즈 타선을 3안타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화이트삭스의
4차전 선발은 1차전에서 고의로 패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던 시카티였다. 그러나
팬들은 그들의 에이스가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시카티는 4회까지 완벽한 피칭으로 레즈 타선을 틀어막았다."고의패배란 결국
헛소문에 불과했다. 패배를 작정한 투수가 어떻게 저렇게 잘 던질 수 있단
말인가? " 화이트삭스 팬들은 시카티의 역투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5회초 레즈 공격에서 시카티는 어처구니없는 실책 2개를 저질러 2실점하고
말았고, 결국 경기는 레즈의 2-0 승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난 후 화이트삭스 감독 키드 글리슨(Kid Gleason)은 "우리 팀이 올해처럼
플레이가 척척 맞아 돌아간 적이 없었는데 1승 3패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라며 푸념했다. 글리슨 감독은 고심 끝에 5차전 선발로
2차전에 등판했던 윌리엄스를 다시 등판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윌리엄스는
감독의 기대대로 완벽한 피칭을 보여줬다. 적어도 5회까지는... 0-0의 팽팽한
균형 속에서 맞이한 6회초 레즈의 공격, 선두타자로 나온 투수 호드 엘러
(Hod Eller)는 좌중간으로 평범한 플라이를 날렸다. 그러나 중견수 해피 펠시
(Happy Felsch)와 좌익수 조 잭슨은 서로 타구를 미루다 안타를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는 송구로 엘러를 3루까지 진루시켰다. 펠시는 뒤이은 에드 라우쉬
(Edd Roush)의 중견수 플라이를 또다시 놓친 후 공을 더듬거리기까지 했고, 결국
화이트삭스는 6회초에만 4실점을 기록했다. 레즈는 9회 1점을 더 보태 5-0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앞서나갔다. 화이트삭스 타선은 이날도
3안타에 그치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화이트삭스가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를 속출하며 1승 4패로 리드 당하자 선수들이
고의로 경기를 패배하려 한다는 의혹은 점점 사실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들의 의혹은 사실이었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시작되기
직전에 화이트삭스 소속의 8명의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시리즈를 고의로
패배하기로 계약을 맺었던 것이었다. 음모에 가담한 8명의 선수는 주모자
격이었던 1루수 갠딜, 투수인 시카티와 윌리엄스, 3루수 프레드 맥멀린
(Fred McMullin), 유격수 찰스 `스위드` 리즈버그(Charles `Swede` Risberg),
만능 내야수 벅 위버(Buck Weaver), 외야수인 잭슨과 펠시였다. 이들은 구단주
찰리 코미스키(Charlie Comiskey)의 연봉정책에 불만을 품고 도박사들로부터
8만달러를 받기로 하고 경기에 져주기로 했다. 그들의 불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코미스키는 지독한 수전노였는데 불세출의 타자라고 불리던 조 잭슨의
연봉이 불과 6000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당시 웬만한 스타플레이어들의
연봉은 1만 달러가 넘었다. ) 코미스키의 악랄한 연봉정책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일화가 1917년에 있었다. 당시 에이스 투수였던 시카티는 시즌 30승을 거둘 경우
코미스키로부터 1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그해 9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카티는 28승을 올렸고, 시즌이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2승을 더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코미스키는 시카티가
28승을 거두자 감독에게 압력을 넣어 그가 남은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하도록
해버렸다. 시카티는 1919년에도 29승을 올렸으나 여전히 연봉은 6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코미스키가 얼마나 악랄한 구단주였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는 또 있다. 당시
선수들은 원정경기를 떠날 때면 구단으로부터 세탁비 명목으로 얼마씩을 받곤
했다. 그러나 코미스키는 선수들에게 세탁비를 지급해주지 않아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원정경기에서는 때에 절은 구질구질한 유니폼을 입고 시합할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돈을 받고 고의로 패배한다는, 운동선수로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은 1차적으로 구단주 코미스키에게 있었던
것이다. 1919년에 이르자 코미스키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은 시즌 중에 파업을
모의할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를 3주정도 앞둔 시점에서
팀의 1루수 갠딜은 도박사들과 고의로 월드시리즈를 패배한다는 비밀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는 점차 선수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그를
포함한 8명이 승부조작에 참여했다.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의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에는 위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갠딜과 계약을 맺은 도박사들은 레즈가 4승 1패로 앞서나가 승패가 어느
정도 결정이 되자 갠딜과의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어졌다. 8명의 화이트삭스
선수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금전적 보상이 적어지자 패하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10월 7일 벌어진 6차전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고, 이번 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정상적인 플레이를 벌인 경기였다. 경기 초반
레즈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선수들 중의 한 명인 화이트삭스 선발 커를
초반부터 몰아쳐 4-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화이트삭스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5회와 6회 4점을 뽑아내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연장 10회 공격에서 고의패배의 주모자 갠딜이 적시타를
터뜨려 5-4로 경기를 뒤집었다. 7차전에서도화이트삭스의 저력은 계속 발휘되었다.
시카티는 이번 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최선을 다한 피칭을 선보였고, 레즈 타선은
그를 좀처럼 공략할 수 없었다. 결국 경기는 4-1 화이트삭스의 승리로 끝났다.
시리즈 전적 4승 3패, 화이트삭스가 지난 2경기에서 보여준 저력을 감안하면
시리즈를 뒤집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미 레즈에게 막대한
돈을 건 도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8차전 선발로 예정되어 있던
`레프티` 윌리엄스에게 해결사를 보내 그를 협박했다. 만약 내일 경기에서
패하지 않으면 그의 부인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화이트삭스는 8차전에서 10-5로 패했고, 시리즈는 레즈의
승리로 끝났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화이트삭스 구단주 코미스키와
감독 글리슨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코미스키는 승부조작의 물증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내걸었다. 1919년 구단주들간의
윈터미팅에서도 화제는 단연 승부조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1920년 시즌이 시작되자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의혹은 또 다른 의혹을 낳았고, 결국 AL 회장 밴 존슨(Ban Johnson)이
직접 승부조작 의혹에 대한 내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9월 24일 뉴욕 자이언츠의
투수 루브 벤턴(Rube Benton)이 시카티, 펠시, 윌리엄스, 갠딜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승부조작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법정에서 의혹을 밝힐 것을
주장했다. 날이 갈수록 조작극의 베일은 벗겨져 갔고 마침내 9월27일
`필라델피아 노스 아메리카`지는 조작된 특정게임, 선수들이 받은 액수까지 소상히
들춰가며 그때까지 나온 기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진상을 밝혔다. 그 기사를
가장 먼저 읽은 사람 가운데 하나인 키드 글리슨 감독은 코미스키 구단주를 다시
한번 만나 모의에 가담한 선수들에 대한 처리방안을 상의했다. 글리슨 감독은
다음날 상오 비상회의에 시카티를 불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코미스키와
글리슨, 그리고 구단고문변호사가 모여 있는 자리에 출두한 시카티는 채근을
받기도 전에 자신의 비행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코미스키와 글리슨은
시카티를 법정에 세웠고, 그의 자백으로 다른 관련자들, 갠딜, 잭슨, 리즈버그
등도 속속 법정에 세워져 그들이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자행한 고의패배의 전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판결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선수들의 변호인측은
"피고인들이 도박사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선수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야구에 누를 끼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비밀리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는 한 국민적
오락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거나 야구산업에 해를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재판을 맡은 판사들를 설득하는데 충분했다.
결국 법정은 화이트삭스 선수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선수들과 도박사들이
유죄가 되려면 월드시리즈의 승부를 뒤엎기로 공모한 의도가 단순히 져주려는
데 있지 않고 대중을 기만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하는데 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구단주들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선임한 대법원 판사출신의
커미셔너 케네소 M. 랜디스 (Kenesaw M. Landis)는 법정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청교도 신도로 정의감에 불타고 있던 랜디스 판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야구계에 만연한 악습에 대해 철퇴를 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론 역시
법정의 결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시카고 헤럴드 앤드 이그재미너`지는 "이번
재판은 승부조작 음모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을 캐기보다는
빠져나갈 구멍만 찾으려 했던 인상이 짙다."고 꼬집었고, `뉴욕 타임스`지는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치 어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희생자를 살해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목을 잘랐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 같았다."고
논평했다. 결국 법정의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 커미셔너 랜디스 판사는 이번
사건에 관련된 8명의 선수에 대해 야구계로부터 영구추방 명령을 내렸다.
야구의 존립자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이 사건은 `블랙삭스 스캔들
(the Black Sox Scandal)`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훗날 `그라운드의 이단아들(Eight Men Out)`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되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구단주의 인색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도박사들과
공모하여 고의로 져주기 게임을 한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야구계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야구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들 뻔했다. 후에 베이브루스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기 전까지 메이져리그는 오랜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사건으로
메이져리그 전체의 판관인 커미셔너 제도가 만들어졌다.
1876년 NL가 창설된 후 ML는 몇 차례의 고비를 겪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비롯된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 1981년과 1994년의 파업사태, 2001년의 테러사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19년 월드시리즈만큼 ML의 존립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사건은 없었다. 1919년 월드시리즈는 ML 역사상 최악의 사태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리즈였다. `Fall Classic history` 그 4번째 시간, 오늘은 ML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했던 사건이 벌어진 1919년 월드시리즈를 살펴보겠다.
1915년 이후 월드시리즈의 흥행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당시의 최강팀은 AL의 보스턴
레드삭스였는데 떠오르는 별 베이브 루스(Babe Ruth)가 투타에서 맹활약한 보스턴은
1915, 1916,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AL는 1917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NL 우승팀인 존 맥그로우(John McGraw)의 뉴욕 자이언츠를
물리쳐 1915년부터 1918년까지 4년 연속으로 NL를 제압하며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19년 시즌, AL의 우승팀은 재작년에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였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베이브 루스가
타격의 모델로 삼았다는 전설적인 타격왕 `맨발의` 조 잭슨(`Shoeless` Joe
Jackson), 명 2루수 에디 콜린스(Eddie Collins), 권투선수 출신의 명 1루수 치크
갠딜(Chick Gandil) 등이 이끄는 막강타선과 에디 시카티(Eddie Cicotte), 클라우드
`레프티` 윌리엄스(Claude "Lefty" Williams)의 막강 원투펀치가 마운드를 지키는
최강팀이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화이트삭스가 NL 챔피언인
신시내티 레즈를 무난히 물리치고 월드시리즈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벌어진 1919년 월드시리즈는 이전과 달리 9전
5선승제로 치러졌다. 구단주들이 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경기 수를 늘린
것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시리즈는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화이트삭스 팀이 고의로 시리즈를 패배하려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전은 10월 1일(미국시간)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인 크로스레이
필드(Crosley Field)에서 벌어졌는데, 레즈의 선발투수는 더치 로이터
(Dutch Ruether), 화이트삭스의 선발은 시카티였다. 마운드의 무게에서는
정규시즌 19승의 로이터는 시카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마운드의 시카티는 시작부터 이상하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4회까지 무려 6점을 실점하며 강판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레즈의 9-1 승리로 끝났고, 시카티의 이해할 수 없는 무기력한 피칭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의패배의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2차전에서도 시즌 중 23승을 거둔 선발 `레프티` 윌리엄스가 사사구를
남발하며 화이트삭스가 4-2로 패배하자 의심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경기가
끝난 후 지난 2경기에서 최선을 다했던 화이트삭스 포수 레이 쇼크(Ray Schalk)가
윌리엄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을 정도였다.
3차전은 10월 3일 화이트삭스의 홈인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에서 벌어졌다.
아직까지 고의패배의 소문을 알지 못하는 화이트삭스 팬들은 홈구장에서 벌어지는
3차전에서 그들이 응원하는 팀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비록
1, 2차전에서 연패하긴 했지만 화이트삭스 타선은 레즈보다 더 많은 안타를 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상대로 화이트삭스는 선발 딕키 커(Dickie Kerr)의 완봉
역투로 3-0으로 승리했다. 커는 시즌 중 겨우 13승에 그쳐 1, 2차전 선발이었던
시카티나 윌리엄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둔 젊은 좌완투수였는데,
그런 그가 레즈 타선을 3안타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화이트삭스의
4차전 선발은 1차전에서 고의로 패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던 시카티였다. 그러나
팬들은 그들의 에이스가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시카티는 4회까지 완벽한 피칭으로 레즈 타선을 틀어막았다."고의패배란 결국
헛소문에 불과했다. 패배를 작정한 투수가 어떻게 저렇게 잘 던질 수 있단
말인가? " 화이트삭스 팬들은 시카티의 역투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5회초 레즈 공격에서 시카티는 어처구니없는 실책 2개를 저질러 2실점하고
말았고, 결국 경기는 레즈의 2-0 승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난 후 화이트삭스 감독 키드 글리슨(Kid Gleason)은 "우리 팀이 올해처럼
플레이가 척척 맞아 돌아간 적이 없었는데 1승 3패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라며 푸념했다. 글리슨 감독은 고심 끝에 5차전 선발로
2차전에 등판했던 윌리엄스를 다시 등판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윌리엄스는
감독의 기대대로 완벽한 피칭을 보여줬다. 적어도 5회까지는... 0-0의 팽팽한
균형 속에서 맞이한 6회초 레즈의 공격, 선두타자로 나온 투수 호드 엘러
(Hod Eller)는 좌중간으로 평범한 플라이를 날렸다. 그러나 중견수 해피 펠시
(Happy Felsch)와 좌익수 조 잭슨은 서로 타구를 미루다 안타를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는 송구로 엘러를 3루까지 진루시켰다. 펠시는 뒤이은 에드 라우쉬
(Edd Roush)의 중견수 플라이를 또다시 놓친 후 공을 더듬거리기까지 했고, 결국
화이트삭스는 6회초에만 4실점을 기록했다. 레즈는 9회 1점을 더 보태 5-0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앞서나갔다. 화이트삭스 타선은 이날도
3안타에 그치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화이트삭스가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를 속출하며 1승 4패로 리드 당하자 선수들이
고의로 경기를 패배하려 한다는 의혹은 점점 사실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들의 의혹은 사실이었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시작되기
직전에 화이트삭스 소속의 8명의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시리즈를 고의로
패배하기로 계약을 맺었던 것이었다. 음모에 가담한 8명의 선수는 주모자
격이었던 1루수 갠딜, 투수인 시카티와 윌리엄스, 3루수 프레드 맥멀린
(Fred McMullin), 유격수 찰스 `스위드` 리즈버그(Charles `Swede` Risberg),
만능 내야수 벅 위버(Buck Weaver), 외야수인 잭슨과 펠시였다. 이들은 구단주
찰리 코미스키(Charlie Comiskey)의 연봉정책에 불만을 품고 도박사들로부터
8만달러를 받기로 하고 경기에 져주기로 했다. 그들의 불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코미스키는 지독한 수전노였는데 불세출의 타자라고 불리던 조 잭슨의
연봉이 불과 6000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당시 웬만한 스타플레이어들의
연봉은 1만 달러가 넘었다. ) 코미스키의 악랄한 연봉정책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일화가 1917년에 있었다. 당시 에이스 투수였던 시카티는 시즌 30승을 거둘 경우
코미스키로부터 1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그해 9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카티는 28승을 올렸고, 시즌이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2승을 더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코미스키는 시카티가
28승을 거두자 감독에게 압력을 넣어 그가 남은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하도록
해버렸다. 시카티는 1919년에도 29승을 올렸으나 여전히 연봉은 6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코미스키가 얼마나 악랄한 구단주였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는 또 있다. 당시
선수들은 원정경기를 떠날 때면 구단으로부터 세탁비 명목으로 얼마씩을 받곤
했다. 그러나 코미스키는 선수들에게 세탁비를 지급해주지 않아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원정경기에서는 때에 절은 구질구질한 유니폼을 입고 시합할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돈을 받고 고의로 패배한다는, 운동선수로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은 1차적으로 구단주 코미스키에게 있었던
것이다. 1919년에 이르자 코미스키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은 시즌 중에 파업을
모의할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를 3주정도 앞둔 시점에서
팀의 1루수 갠딜은 도박사들과 고의로 월드시리즈를 패배한다는 비밀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는 점차 선수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그를
포함한 8명이 승부조작에 참여했다.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의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에는 위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갠딜과 계약을 맺은 도박사들은 레즈가 4승 1패로 앞서나가 승패가 어느
정도 결정이 되자 갠딜과의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어졌다. 8명의 화이트삭스
선수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금전적 보상이 적어지자 패하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10월 7일 벌어진 6차전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고, 이번 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정상적인 플레이를 벌인 경기였다. 경기 초반
레즈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선수들 중의 한 명인 화이트삭스 선발 커를
초반부터 몰아쳐 4-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화이트삭스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5회와 6회 4점을 뽑아내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연장 10회 공격에서 고의패배의 주모자 갠딜이 적시타를
터뜨려 5-4로 경기를 뒤집었다. 7차전에서도화이트삭스의 저력은 계속 발휘되었다.
시카티는 이번 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최선을 다한 피칭을 선보였고, 레즈 타선은
그를 좀처럼 공략할 수 없었다. 결국 경기는 4-1 화이트삭스의 승리로 끝났다.
시리즈 전적 4승 3패, 화이트삭스가 지난 2경기에서 보여준 저력을 감안하면
시리즈를 뒤집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미 레즈에게 막대한
돈을 건 도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8차전 선발로 예정되어 있던
`레프티` 윌리엄스에게 해결사를 보내 그를 협박했다. 만약 내일 경기에서
패하지 않으면 그의 부인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화이트삭스는 8차전에서 10-5로 패했고, 시리즈는 레즈의
승리로 끝났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화이트삭스 구단주 코미스키와
감독 글리슨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코미스키는 승부조작의 물증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내걸었다. 1919년 구단주들간의
윈터미팅에서도 화제는 단연 승부조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1920년 시즌이 시작되자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의혹은 또 다른 의혹을 낳았고, 결국 AL 회장 밴 존슨(Ban Johnson)이
직접 승부조작 의혹에 대한 내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9월 24일 뉴욕 자이언츠의
투수 루브 벤턴(Rube Benton)이 시카티, 펠시, 윌리엄스, 갠딜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승부조작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법정에서 의혹을 밝힐 것을
주장했다. 날이 갈수록 조작극의 베일은 벗겨져 갔고 마침내 9월27일
`필라델피아 노스 아메리카`지는 조작된 특정게임, 선수들이 받은 액수까지 소상히
들춰가며 그때까지 나온 기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진상을 밝혔다. 그 기사를
가장 먼저 읽은 사람 가운데 하나인 키드 글리슨 감독은 코미스키 구단주를 다시
한번 만나 모의에 가담한 선수들에 대한 처리방안을 상의했다. 글리슨 감독은
다음날 상오 비상회의에 시카티를 불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코미스키와
글리슨, 그리고 구단고문변호사가 모여 있는 자리에 출두한 시카티는 채근을
받기도 전에 자신의 비행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코미스키와 글리슨은
시카티를 법정에 세웠고, 그의 자백으로 다른 관련자들, 갠딜, 잭슨, 리즈버그
등도 속속 법정에 세워져 그들이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자행한 고의패배의 전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판결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선수들의 변호인측은
"피고인들이 도박사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선수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야구에 누를 끼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비밀리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는 한 국민적
오락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거나 야구산업에 해를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재판을 맡은 판사들를 설득하는데 충분했다.
결국 법정은 화이트삭스 선수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선수들과 도박사들이
유죄가 되려면 월드시리즈의 승부를 뒤엎기로 공모한 의도가 단순히 져주려는
데 있지 않고 대중을 기만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하는데 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구단주들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선임한 대법원 판사출신의
커미셔너 케네소 M. 랜디스 (Kenesaw M. Landis)는 법정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청교도 신도로 정의감에 불타고 있던 랜디스 판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야구계에 만연한 악습에 대해 철퇴를 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론 역시
법정의 결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시카고 헤럴드 앤드 이그재미너`지는 "이번
재판은 승부조작 음모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을 캐기보다는
빠져나갈 구멍만 찾으려 했던 인상이 짙다."고 꼬집었고, `뉴욕 타임스`지는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치 어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희생자를 살해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목을 잘랐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 같았다."고
논평했다. 결국 법정의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 커미셔너 랜디스 판사는 이번
사건에 관련된 8명의 선수에 대해 야구계로부터 영구추방 명령을 내렸다.
야구의 존립자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이 사건은 `블랙삭스 스캔들
(the Black Sox Scandal)`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훗날 `그라운드의 이단아들(Eight Men Out)`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