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코드 인사를 넘어서는 개신교 정부
2008.03.13 09:05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79코드 인사야 이념과 성향이 맞다 치겠지만, 이건 뭐 개신교판이라니...
완전 교회쟁이들의 잔치로구만. 이승만도 그렇고, 영삼이도 그렇고 개신교 애들은
왜 이리 대통령이 되면 종교 세 확장에 기를 쓰는지 몰라.
참고로 개신교도는 우리나라 인구의 20%가 채 안되며, 숫자는 감소추세다.
그런데 50%가 넘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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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비율별로 보면 장관 63%, 청와대 수석 50%, 대통령 비서관 39% 등으로,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 압도적인 수치다. 가톨릭의 경우 청와대 수석은 1명도 없고 장관 2명,
대통령 비서관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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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땅에 교회쟁이들의 번성을 가져왔지만, 민족 전체로는 개막장으로 몰고 간
살인마 이승만의 행보는 아래와 같다. 참고로 이 당시 한국내 개신교인 비율은 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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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승만)는 개신교 신자들을 권력구조에 대거 충원하였다. 기독교인의 정부 요직
충원은 미군정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대통령은 이 관행을 계승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기독교 국가건설 비전을 실현해나갔다. 1948년 정부탄생 후 초대 내각에는 국무
총리를 제외한 21개 부서장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9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
2명은 목사였다. 자유당 집권기에 정부의 요직을 겸한 인물들의 종교적 배경을 살펴
보면, 개신교 32.9%, 천주교 7.4%, 불교 16.2%, 유교 17.6%, 천도교 0.3%,
미상 18.3%이었다. 제1공화국기의 국회의원 200여명 가운데 약 25%, 그리고 19개
부처의 장 차관 242명 가운데 38%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이 가운데 각 부처의
장 135명의 경우 개신교인의 비율은 무려 47.7%에 달했다. 이대통령 집권기 남한의
총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국회의원 가운데 약 25%, 그리고 정부의 요직을 점유한 인사 가운데 약47%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이 정부 내에 過(과)대표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외에 1948년부터 설립이 추진되어 오던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1954년에 미국의 각 교파 연합 매스컴위원회(RAVEMCO)의 지원으로써 개국하는
것을 인가했으며, 1956년 12월에는 복음주의연맹선교회(TEAM)가 공산권 선교를
목적으로 추진한 극동방송국의 설립을 인가했다. 이 가운데 CBS는 1959년 이후 대구
부산 광주 이리 등지에 지국을 설립함으로써 1950년대 후반에 청취율이 가장 높은
방송국이 되었다. 이 밖에도 이대통령 정부는 국영 중앙방송국에서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방송을 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다섯째, 이대통령은 기독교 신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에게 재정적인 특혜를 베풂으로써
기독교 선교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기독교계는 이러한 구제품 및 달러를 KNCC를 통해 집중적으로 공급받아 전쟁
중에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고아원 모자원 같은 사회사업기관을 설립 운영하였다.
1957년 현재 개신교 계통에서 운영하는 각종 사회복지시설은 539개소, 수용 인원은
63,787명에 달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계는 이미 확보된 교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난민과 고아 그리고 과부 등 일반인을 상대로 구호사업을 벌임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대통령은 이상과 같이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를 장려한 결과 그의 집권기에 남한의
개신교 교세는 <표1>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하고 있었다.
위의 통계는 이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획기적으로 신장하였으며
그 때에 다져진 넓은 기초에 바탕 하여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대통령은 신 대한을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으로 건설’하겠다는 1919년의 포부를 ─ 서재필이 1920년 10월에
이승만에게 제시한 방략(라-10, 11)에 따라 ─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통령 치하에서 남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불교정권’ 및 조선의 ‘유교왕조’와 대비되는 ─ ‘기독교적 정권’ 내지 ‘기독교 국가
(Christiandom)’가 대두하였고 그의 통치기간에 다져진 교회의 기반이 1960년대 이후
남한이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부상하는데 도약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이대통령은 서기 372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유교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의
小獸林王(수수림왕), 치세:371~384)이나 유럽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로서
‘종교 자유의 칙령’(313)을 발포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r. 306~337)의 공적에 비견되는 업적을 한국 종교사에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완전 교회쟁이들의 잔치로구만. 이승만도 그렇고, 영삼이도 그렇고 개신교 애들은
왜 이리 대통령이 되면 종교 세 확장에 기를 쓰는지 몰라.
참고로 개신교도는 우리나라 인구의 20%가 채 안되며, 숫자는 감소추세다.
그런데 50%가 넘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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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비율별로 보면 장관 63%, 청와대 수석 50%, 대통령 비서관 39% 등으로,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 압도적인 수치다. 가톨릭의 경우 청와대 수석은 1명도 없고 장관 2명,
대통령 비서관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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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땅에 교회쟁이들의 번성을 가져왔지만, 민족 전체로는 개막장으로 몰고 간
살인마 이승만의 행보는 아래와 같다. 참고로 이 당시 한국내 개신교인 비율은 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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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승만)는 개신교 신자들을 권력구조에 대거 충원하였다. 기독교인의 정부 요직
충원은 미군정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대통령은 이 관행을 계승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기독교 국가건설 비전을 실현해나갔다. 1948년 정부탄생 후 초대 내각에는 국무
총리를 제외한 21개 부서장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9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
2명은 목사였다. 자유당 집권기에 정부의 요직을 겸한 인물들의 종교적 배경을 살펴
보면, 개신교 32.9%, 천주교 7.4%, 불교 16.2%, 유교 17.6%, 천도교 0.3%,
미상 18.3%이었다. 제1공화국기의 국회의원 200여명 가운데 약 25%, 그리고 19개
부처의 장 차관 242명 가운데 38%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이 가운데 각 부처의
장 135명의 경우 개신교인의 비율은 무려 47.7%에 달했다. 이대통령 집권기 남한의
총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국회의원 가운데 약 25%, 그리고 정부의 요직을 점유한 인사 가운데 약47%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이 정부 내에 過(과)대표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외에 1948년부터 설립이 추진되어 오던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1954년에 미국의 각 교파 연합 매스컴위원회(RAVEMCO)의 지원으로써 개국하는
것을 인가했으며, 1956년 12월에는 복음주의연맹선교회(TEAM)가 공산권 선교를
목적으로 추진한 극동방송국의 설립을 인가했다. 이 가운데 CBS는 1959년 이후 대구
부산 광주 이리 등지에 지국을 설립함으로써 1950년대 후반에 청취율이 가장 높은
방송국이 되었다. 이 밖에도 이대통령 정부는 국영 중앙방송국에서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방송을 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다섯째, 이대통령은 기독교 신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에게 재정적인 특혜를 베풂으로써
기독교 선교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기독교계는 이러한 구제품 및 달러를 KNCC를 통해 집중적으로 공급받아 전쟁
중에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고아원 모자원 같은 사회사업기관을 설립 운영하였다.
1957년 현재 개신교 계통에서 운영하는 각종 사회복지시설은 539개소, 수용 인원은
63,787명에 달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계는 이미 확보된 교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난민과 고아 그리고 과부 등 일반인을 상대로 구호사업을 벌임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대통령은 이상과 같이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를 장려한 결과 그의 집권기에 남한의
개신교 교세는 <표1>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하고 있었다.
위의 통계는 이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획기적으로 신장하였으며
그 때에 다져진 넓은 기초에 바탕 하여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대통령은 신 대한을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으로 건설’하겠다는 1919년의 포부를 ─ 서재필이 1920년 10월에
이승만에게 제시한 방략(라-10, 11)에 따라 ─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통령 치하에서 남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불교정권’ 및 조선의 ‘유교왕조’와 대비되는 ─ ‘기독교적 정권’ 내지 ‘기독교 국가
(Christiandom)’가 대두하였고 그의 통치기간에 다져진 교회의 기반이 1960년대 이후
남한이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부상하는데 도약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이대통령은 서기 372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유교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의
小獸林王(수수림왕), 치세:371~384)이나 유럽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로서
‘종교 자유의 칙령’(313)을 발포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r. 306~337)의 공적에 비견되는 업적을 한국 종교사에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