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sh206

회원가입로그인
http://mlbpark.donga.com/nboard/ssboard.php?bbs=b_bullpen&no=172169&s_work=view불펜의 xenophon님이 올리신 글을 퍼왔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보면 왕이름들이 대부분 조(祖)나 종(宗)으로 끝남을 볼수있다.
이런것을 묘호(廟號)라고 하는데 시호와는 다르게 왕의 평생업적을 기려 붙이는 것이다. 묘호라는 것은 역대 왕들을 제사지내는 곳인 종묘에 왕을 봉안할때에 붙이는 것으로 왕의 평생업적을 그 두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한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묘호가 붙지 못한 두왕(연산군,광해군)은 지금 종묘에 위폐가 봉안되어 있지 않다.

묘호를 붙이는 원칙은 앞의 글자는 여러글자가 사용되지만 마지막 글자는 조(조)나 종(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이는 주례에 나와있는 이공위조(以功爲祖) 이덕위종(以德爲宗)원칙에 따랐기 때문이다.

묘호의 시작은 서한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모든황제에게 묘호를 내린것이 아니라 재위시 커다란 업적이 있어야지만 묘호를 받을수 있었다.즉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황제에게만 묘호를 내린것이 었다.
그러나 동한이후 그런 엄격한 원칙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황제에게 묘호가 내려서 이것이 일종의 전통이 되어 특별한 경우(폐위되거나 일찍죽는등의 변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황제가 묘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묘호를 받더라고 창엽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끝이 종(宗)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창업주의 공을 뛰어넘을수 없다는 생각과 왕조를 처음연분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왕조수성에는 공보다는 덕이 중하다는 생각때문에 종(宗)을 붙이는것이 관례화 되었다.

우리나라도 신라시기에 묘호를 받은 왕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상례화해서 붙인것은 고려시대로 총 34명의 왕중에서 24분의 왕이 묘호를 받았다.
제외된 왕은 원간섭기의 6명의 충(忠)자돌림왕 폐위된 2명의 왕(우왕,창왕) 그리고 시호만 받은 공민,공양왕 이렇게 10분이다.
고려는 묘호도 원칙에 충실해서 창업주인 태조(太祖)왕건을 제외하곤 23명이 모두 종(宗)자로 묘호가 끝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다른 모습이 보이는데 창업주인 태조(太祖)이성계를 제외하고도 무려 6분의 왕이 묘호를 조(祖)자로 받았다.(추존왕 제외)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런 이유는 명나라와 관련이 있는데 종전의 중국왕조에서도 창업주를 제외하고는 제위한 황제중에서는 묘호를 조(祖)자로 받은 왕이 없었지만 명나라 3대황제인 영락제가 창업주가 아닙에도 불구하고 성조(成祖)라는 묘호를 받음으로써 이런 원칙이 깨지게 되었다.

원칙이 깨지게 된 이유는 영락제가 상당히 많은 피를 보고 황위에 올랐다는데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황제인 주원장은 상당히 많은 아들들을 두었는데 그중 태자인 표가 일찍 죽자 적장손인 윤문에게 황위를 넘겨주었으니 이가 바로 건문제이다.

매우 어린나이에 황위에 오른 건문제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숙부들의 봉지를 삭감하거나 역모죄를 씌워서 박탈했는데 이 과정중 연왕 체(후일 영락제)가 거세게 반발하고 다른 황족들도 가세함에 따라 약4년에 걸친 내란이 일어났다.(정난의 변)
이런 내란을 거치고 조카인 건문제를 제거하고 황위에 오른 영락제는 정통성과 도덕성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였고 여러가지 치적을 쌓았지만 그에게는 정통성 부제가 항상따라 다녔다.(여항에서는 건문제의 생존설이 왕조가 망할때 까지 돌아 다녔다)

그래서 영락제가 죽자 대신들이나 후임황제는 이런 정통성부재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영락제의 묘호를 성조(成祖)라고 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영락제의 공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고 황위에 올랐기에 왕조를 재창업한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묘호를 그렇게 내린것이다.
이후에도 명조에는 없지만 청조에서 두명의 황제가 창업주가 아님에도 조(祖)자로 묘호를 받았다.

이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묘호가 조(祖)자로 끝나는 왕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묘호가 조(祖)로 끝나는 왕들


(1)세조(世祖)


세조도 영락제와 왕위에 오른과정이 매우 흡사하다 둘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좌에 올랐으며 많은 대신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왕권을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흡사한면이 있다.그래서 세조도 이런 영락제의 전철을 밟은것이라 생각할수 있지만 내막은 상당히 복잡하다.

대신들은 세조가 죽자 묘호를 덕종이나 광종들으로 상당히 온화하게 지으려고 했지만 당시 왕이 였던 예종이 강하게 거부하고 끝에 조(祖)자를 붙일것을 요구 하였다.
당시 대신들은 대부분 선왕의 공신들로써 자신들이 피를통해 오른것을 꺼림칙 했었고 선왕자신도 성전에 상당히 자책감이 있어서 대신들이 덕을 강조하는 묘호를 주상해지만 예종이 거부함으로써 묘호가 바뀌게 되었다.

또 이렇게 예종이 선왕의 묘호를 조(祖)자로 붙이기 원한것은 자신의 왕권를 공고하게 하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기도 했다.
예종은 본시 적장자가 아닌 차자였다 그러다 형인 의경세자가 죽음으로써 대신들의 합의에 따라 의경세자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해양대군 자신이 왕위게 오르게 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당시 왕권은 매우약화 되었다. 이런 결과로 예종은 선왕의 묘호를 조(祖)로 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으나 미쳐 그 뜻을 펴기도 전에 승하하였다.(1년 2개월 재위)



(2)선조(宣祖)

조선시대는 선조부터 방계왕통이 시작되었다. 그이전에는 적장가 아니더라고 후궁소생이 아니라 국모인 정비소생이였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선조때부터는 그런 정통성에 큰 흠이 가기 시작했다.선왕인 명종이 후사가 없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중종의 8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3남이였다.

명종은 세자가 어린나이(13세)에 죽자 이후 종친중에서 적당한 세자감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중 하성군(선조)이 매우 영특하여서 매우 귀엽게 여기고 자주 궁안에 불렀는다. 그런 연유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이 방계로 왕위에 오른 열등감을 선정(善政)을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지만 내우외환에 시달린 끝에 승하하였다,

선조는 묘호가 원래 선종이였지만 광해군 시기에 대북파인 이이첨과 허균의 강력한 거의로 개정되었다. 개정의 표면상 이유는 선왕이신 선조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막은 공이 이나라를 다시 구하여서 왕조가 끊어지지 않았음으로 그 공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선왕의 임란시기의 공을 강조하면 그당시 분조를 이끌고 많은 성과를 올린 광해군의 입지가 상승하고 정통성의 부재를 어느정도 만회할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엇다.

광해군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불안정 했는데 이유는 선조자신이 방계형통이라는 것에 상당히 집착을 해서 다음 왕위는 꼭 적장자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으나 정비에게서 후사를 못얻고 임란이 터집에따라 조야에 명먕이 있던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서 분조를 이끌게 했다. 즉 자의보다는 타의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였다. 또한 임란이후 선조는다시 가례를 올렸는데 여기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얻어서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의 입지가 매우 좁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해군이 당시 고명대신이였던 유영경이 왕의 고명조서를 숨김으로써 왕비였던 인목왕후의 언문교지로 왕위에 오름에 따라 왕권이 극도로 불안하였다.
그래서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자 광해군 초기에 선조의 묘호사 개정된것이다.


(3)인조(仁祖)


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오른 두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인조의 문제는 자신이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고 또한 그런 즉위가 반정공신들의 정치적 선택임에 있었다.
그런 선택의 이유는 선조가 생전시에 제일 귀여워한 신성군의 동복아우인 정원군의 아들이라는 점과 동생인 능원군이 광해군때에 역모죄에 몰려서 죽음에 따라 거사에 순순히 참여하리라는 판단에서 였다.

이런 연유로 인조는 왕권이 공고하지 못했고 두번의 호란을 통해서 오랑케라고 업신여기던 청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래서 인조가 죽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자신들이 옹위한 왕이 업적이 거의 전무함에 따라 덕을 강조하고 정통성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묘호를 인조(仁祖)로 올리게 되었다.


(4)영조(英祖),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문조(文祖)

위 다섯분의왕은 모두 고종과 관련이 있다.
고종은 1897년 아관파천이후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고 연호를 제정해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제국의 예법에 따라 자신의 직계 선대5대를 모두 추존하였는데 이경과로 위 다섯분의 묘호가 모두 바뀌게 되었다.(장조는 제외)
그래서 영종,정종,순종은 모두 묘호가 개정되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익종으로 추존되었던 효명세자도 문조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것은 고종이전의 왕이였던 헌종과 철종은 묘호가 바뀌지 않았다는데에 있다.

이유는 고종이전의 왕이였던 철종에게 있다.
효명세자의 아들이였던 헌종이 후사없이 23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자 왕실에서는 큰문제가 생겼다. 즉 대를 이을 종친이 마땅히 없었다는 것이였다.
대부분 세도가인 전조(塼趙)와 장김(莊金)집안에서 좀 똑똑하다싶은 종친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족내 8촌에 해당되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은언군의 손자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왕위에 올리니 이가 바로 철종이다.

그러나 철종은 문제가 있었는데 선왕인 헌종의 아저씨뻘이 되서 왕실 법통상 헌종의 양자가 될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가인 안동김씨가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법통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조카뻘되는 헌종의 양자로 철종을 입적시켜 종묘에 고하게 하는 일을 벌렸다. 그러나 이런 촌극도 잠시 철종도 후사 없이 죽자 또 왕실에 후사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풍양조씨일가가 빨리 대처해서 흥선군의 아들을 재빨리 보위에 올림으로써 주도권이 풍양조씨로 넘어 왔다.
왕위에 오른 고종은 철종의 양자로 입적되지 않고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졌는데 이유는 고종이 풍양조씨의 지원을 힘입어 올랐다는 점이 있고(효명세자의 세자빈이 풍양조씨)원래는 철종이 고종의 아저씨가 되지만 철종이 조카인 헌종의 양자로 들어감에 따라 고종과 같은 항렬이 되 고종이 철종의 양자가 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계승상의 문제 때문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이 두명의 왕은 추존에서 제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추존상 문제가 생긴것은 바로 정조의 생부(生父)인 장조에 관한 것이다. 원래대로는 문제가 없지만 정조가 장조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것이 아니라 장조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입적되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된것은 장조가 대리청정시 준론(峻論)의 정치적 술수와 모함에 걸려 폐서인이 된다음 뒤주에서 굶어 죽었기 때문에 생긴것인데 후일 영조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폐서인의 조치 철회하지 않았고 당시 집권당이였던 준론이 폐서인의 아들은 왕위에 오르면 문제가 있다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정조는 결국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 왕위에 오르게 된것이다.

이런 결과로 효장세자가 원래대로하면 추존되어야 했지만 고종도 장조의 후손(장조의 셋째 은신군의 증손자)이였고 장조가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