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피휘에 관한 다른 얘기들
2007.10.08 12:08
중국과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임금이나 스승 부모만이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물론 임금도 함부로 신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나 관직 등으로 불렀다. 뼈대있는 집안에서는 부모도 자식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물론 신하는 임금에게, 아들은 부모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칭한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이롭지 않다는 생각도 깃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도 된다.
사람은 이름(본명) 이외에 아명이라는 것이 있다. 어릴때 부르는 또다른 이름으로 대개 무지 촌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예전 시골에서 이런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본명을 부르면 안좋다는 생각에 다른 이름을 만들어서 부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를 만들어서 이름 대신 썼다. 친구 사이에 이름 대신 자를 불렀다.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사마천의 사기 등의 사서에도, 삼국지연의에도 이런 자가 많이 쓰였다. 벼슬에 나가면 관직으로 부른다. 호를 지어서 쓰기도 하고 죽으면 시호를 받기도 한다. 곧 명망있는 사람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본명이 불리지 않는다.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도 않았다. 항렬자라는 것도 결국 자기 조상과 이름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한 집안의 수십대에 이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항렬에 맞게 썼다. 동성동본의 경우 이름만 알면 그가 그 집안의 몇대손인지 알 수 있다. 우리 집안의 경우 나는 섭(燮)자 항렬이다. 아버지는 東, 할아버지는 洛, 아들대는 圭다. 집안끼리 만나면 이름만 가지고도 나와의 수직관계를 곧바로 알 수 있다. 상하관계만 따지기에는 항렬자가 무지 편하다. 주민번호만 가지고 나이,지역을 알 수 있듯이 이름만 가지고 몇대손인지 알 수 있다니 얼마나 편한가? 그러나 그만큼 개인의 개성은 억압될 수 밖에 없다.
유럽은 어떨까? 유럽에서는 이런 것이 없다. 고대 그리스부터 이런 것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탄탈로스를 비롯해 여러 동명이인이 나온다. 두 사람의 탄탈로스는 같은 집안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할아버지, 삼촌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이모나 고모 할머니 이름을 쓰기도 한다. 친한 친구의 이름을 자식에게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Jr.를 붙이기도 한다. 이러니 이름을 가지고 집안에서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이런 짓은 아주 무식한,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다.
국휘(國諱)는 帝王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진시황 정(政)은 자신의 이름인 政자를 쓰지못하게 해서 모두 正(정)으로 바꾸게 했다. 漢나라에서는 漢 高祖 유방(劉邦)의 이름인 ‘邦’자를 피하여 논어에 나오는 '방'자를 국(國)자로 바꾸었다.
성휘(聖諱)는 聖賢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다. 청나라 옹정제가 교지를 내려서 사서오경 외의 책에 나오는 구자를 모두 구(邱)로 바꾸게 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대구도 大丘에서 大邱로 바뀌었다.
가휘(家諱)는 집안 어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사기를 지은 司馬遷은 아버지 이름이 ‘談’이므로 그가 편찬한 『史記』에서 담자를 同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휘법(諱法)은 주나라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송시대에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피휘(避諱)의 방법으로는 개자(改字-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방법), 결자(缺字 - 해당 글자를 아예 안쓰고 공란처리하는 방법), 결획(缺畵 - 일부 획을 생략하는 방법) 등의 방법이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경우 세는 대(代)로(뜻이 비슷한 개자), 민은 씨(氏)로(획을 생략한 결획) 바꾸었다. 휘 때문에 관명(官名)·지명(地名)·물명(物名) 등이 개폐(改廢)된 일은 허다하다.
避諱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 엄격히 시행돼 백성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시대의 왕은 되도록 이름을 僻字(벽자·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로 사용해 백성을 배려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쉽게 읽을 수조차 없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避諱를 범하면 불경죄로 엄한 처벌이 따랐다.
진시황 정의 아버지의 이름은 자초(子楚)다. 여불위의 권유로 초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자 문제가 생겼다. 이후 진나라에서는 초(楚)자가 공문서에서 사라졌다. 초나라를 형(荊)나라로 바꿔서 표기했다. 초나라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상산 조자룡. 삼국지에 나오는 조운을 일컷는 별명이다. 상산 출신의 조자룡이라는 말인데 상산(常山)은 원래 항산(恒山)이었다. 그런데 한나라 황제 가운데 유항(劉恒)이란 이가 있어서 그 이후에 상산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이름 외에도 다른 많은 글자를 제한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는데 이것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김처선(金處善)은 환관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이 쫓겨날 때까지 이 명령은 지켜졌다.
避諱는 周나라 때부터 시행돼 唐宋시대에 엄하게 적용되는데 대체로 闕字(궐자)와 厥劃(궐획), 改字(개자)의 가지 방법이 있었다. 闕字는 해당되는 글자를 아예 쓰지 않고 공란, 즉 정사각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이다. 厥劃은 글자의 일부 획을 생략하는 방법으로 지난 회에 언급했던 唐太宗 李世民의 경우 民자를 氏자로 대치했다. 마지막으로 改字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이다. 唐太宗 때 世를 代로 바꾼 것이나 蘇東坡(소동파)가 조부의 이름 蘇序(소서)를 피해 평생 序文을 引文, 또는 敍文이라고 썼던 것이 좋은 예다.
避諱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 엄격히 시행돼 백성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왕은 되도록 이름을 僻字(벽자·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로 사용해 백성을 배려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쉽게 읽을 수조차 없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避諱를 범하면 불경죄라 해 엄한 처벌이 따랐다. 淸의 乾隆(건륭) 때 王錫侯(왕석후)는 字貫(자관)이란 책을 썼다가 斬刑(참형)을 당했다. 凡例중에서 乾隆의 조부와 부친인 康熙(강희), 雍正(옹정)의 이름자를 사용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람은 이름(본명) 이외에 아명이라는 것이 있다. 어릴때 부르는 또다른 이름으로 대개 무지 촌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예전 시골에서 이런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본명을 부르면 안좋다는 생각에 다른 이름을 만들어서 부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를 만들어서 이름 대신 썼다. 친구 사이에 이름 대신 자를 불렀다.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사마천의 사기 등의 사서에도, 삼국지연의에도 이런 자가 많이 쓰였다. 벼슬에 나가면 관직으로 부른다. 호를 지어서 쓰기도 하고 죽으면 시호를 받기도 한다. 곧 명망있는 사람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본명이 불리지 않는다.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도 않았다. 항렬자라는 것도 결국 자기 조상과 이름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한 집안의 수십대에 이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항렬에 맞게 썼다. 동성동본의 경우 이름만 알면 그가 그 집안의 몇대손인지 알 수 있다. 우리 집안의 경우 나는 섭(燮)자 항렬이다. 아버지는 東, 할아버지는 洛, 아들대는 圭다. 집안끼리 만나면 이름만 가지고도 나와의 수직관계를 곧바로 알 수 있다. 상하관계만 따지기에는 항렬자가 무지 편하다. 주민번호만 가지고 나이,지역을 알 수 있듯이 이름만 가지고 몇대손인지 알 수 있다니 얼마나 편한가? 그러나 그만큼 개인의 개성은 억압될 수 밖에 없다.
유럽은 어떨까? 유럽에서는 이런 것이 없다. 고대 그리스부터 이런 것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탄탈로스를 비롯해 여러 동명이인이 나온다. 두 사람의 탄탈로스는 같은 집안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할아버지, 삼촌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이모나 고모 할머니 이름을 쓰기도 한다. 친한 친구의 이름을 자식에게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Jr.를 붙이기도 한다. 이러니 이름을 가지고 집안에서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이런 짓은 아주 무식한,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다.
국휘(國諱)는 帝王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진시황 정(政)은 자신의 이름인 政자를 쓰지못하게 해서 모두 正(정)으로 바꾸게 했다. 漢나라에서는 漢 高祖 유방(劉邦)의 이름인 ‘邦’자를 피하여 논어에 나오는 '방'자를 국(國)자로 바꾸었다.
성휘(聖諱)는 聖賢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다. 청나라 옹정제가 교지를 내려서 사서오경 외의 책에 나오는 구자를 모두 구(邱)로 바꾸게 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대구도 大丘에서 大邱로 바뀌었다.
가휘(家諱)는 집안 어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사기를 지은 司馬遷은 아버지 이름이 ‘談’이므로 그가 편찬한 『史記』에서 담자를 同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휘법(諱法)은 주나라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송시대에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피휘(避諱)의 방법으로는 개자(改字-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방법), 결자(缺字 - 해당 글자를 아예 안쓰고 공란처리하는 방법), 결획(缺畵 - 일부 획을 생략하는 방법) 등의 방법이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경우 세는 대(代)로(뜻이 비슷한 개자), 민은 씨(氏)로(획을 생략한 결획) 바꾸었다. 휘 때문에 관명(官名)·지명(地名)·물명(物名) 등이 개폐(改廢)된 일은 허다하다.
避諱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 엄격히 시행돼 백성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시대의 왕은 되도록 이름을 僻字(벽자·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로 사용해 백성을 배려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쉽게 읽을 수조차 없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避諱를 범하면 불경죄로 엄한 처벌이 따랐다.
진시황 정의 아버지의 이름은 자초(子楚)다. 여불위의 권유로 초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자 문제가 생겼다. 이후 진나라에서는 초(楚)자가 공문서에서 사라졌다. 초나라를 형(荊)나라로 바꿔서 표기했다. 초나라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상산 조자룡. 삼국지에 나오는 조운을 일컷는 별명이다. 상산 출신의 조자룡이라는 말인데 상산(常山)은 원래 항산(恒山)이었다. 그런데 한나라 황제 가운데 유항(劉恒)이란 이가 있어서 그 이후에 상산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이름 외에도 다른 많은 글자를 제한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는데 이것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김처선(金處善)은 환관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이 쫓겨날 때까지 이 명령은 지켜졌다.
避諱는 周나라 때부터 시행돼 唐宋시대에 엄하게 적용되는데 대체로 闕字(궐자)와 厥劃(궐획), 改字(개자)의 가지 방법이 있었다. 闕字는 해당되는 글자를 아예 쓰지 않고 공란, 즉 정사각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이다. 厥劃은 글자의 일부 획을 생략하는 방법으로 지난 회에 언급했던 唐太宗 李世民의 경우 民자를 氏자로 대치했다. 마지막으로 改字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이다. 唐太宗 때 世를 代로 바꾼 것이나 蘇東坡(소동파)가 조부의 이름 蘇序(소서)를 피해 평생 序文을 引文, 또는 敍文이라고 썼던 것이 좋은 예다.
避諱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 엄격히 시행돼 백성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왕은 되도록 이름을 僻字(벽자·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로 사용해 백성을 배려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쉽게 읽을 수조차 없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避諱를 범하면 불경죄라 해 엄한 처벌이 따랐다. 淸의 乾隆(건륭) 때 王錫侯(왕석후)는 字貫(자관)이란 책을 썼다가 斬刑(참형)을 당했다. 凡例중에서 乾隆의 조부와 부친인 康熙(강희), 雍正(옹정)의 이름자를 사용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