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2007.04.20 09:22
요즘 들어서 사람들의 생각을 듣다가 답답한 것중의 하나가 바로 저거다.
'돈도 많이 버는 주제에 데모나 하냐',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그냥 참아라'
'그 정도 갖고 뭐가 힘들다고 하냐. 그냥 참아라'
왜 '나는 힘들지만 너의 길이 내게도 도움이 될 거다' 이런 게 안될까.
사회적 연대 의식은 채 자라기도 전에 모두들 파편화되고 거대 자본에 그저 휘둘리기만
할 뿐. 이런 때는 정말 '대중은 무지하다.'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휴우...
아래는 프레시안 기사 발췌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418192437
"저렇게 데모나 하는 새끼들,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데…."
고(故)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18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지나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계속 구시렁댔다. "허세욱 씨도 당신처럼 택시 기사였어요"라는 말이 목으로 넘어오려 했지만, 그냥 꾹 눌러 삼켰다.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이런 반응이 그다지 낯설지 않아서다. 각종 온라인 뉴스 사이트에 실린 고 허세욱 씨 관련 기사의 댓글 중에도 이런 내용이 흔하다. "택시 기사가 FTA에 대해 뭘 안다고…." "FTA가 택시 기사와 관계가 있나요? 별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분신을 한 거죠" 등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게 적나라한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
잠시 머뭇대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택시 기사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FTA는 해야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잖아요. 농민들이야 손해보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죠." 대화가 멎었다. 너무 익숙한 반응이어서 금새 흥미를 잃었다.
이 택시 기사처럼 한미FTA를 찬성하는 측도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이 있다는 데는 대개 동의한다. 대신 이렇게 피해를 보는 경우보다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판단이 정확한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리다.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한미FTA로 피해보는 이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면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고 여기고 있다면 분명히 병리적 상황이다. 자신이 누리게 될 이익이 약자의 피해를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당연시하는 게 정상일 리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질환일 수 있다.
앞서의 상황에서라면 "(피해보는 측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찬성한다"는 게 정상이다.
조승희 씨와 한국 사회의 닮은 점…남의 아픔에 공감 못 해
그런데 FTA 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접한 이날, 대부분의 매체가 하필 '총기난사'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버지니아공대 학생 조승희 씨의 총기난사 사건이다.
조 씨의 범행동기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직은 명확한 게 없다. 조 씨는 어떤 이유로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게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총에 맞아 희생될 이들,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 하고 있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누군가는 한미FTA로 피해를 본다"고 여기면서도 FTA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과 닮았다.
"내가 힘드니, 남은 덜 힘들었으면" vs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고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서울 시청 근처를 다 지나갔을 때, 택시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허세욱 씨)도 택시를 몰았다던데…. 택시 기사 중에 안 힘든 사람 있나요. 다 힘들지. 그렇다고 죽긴 왜 죽나."
"허세욱 씨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한미FTA가 체결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거예요." 맥없는 대답을 내놓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관련기사 : "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 "늘 따뜻했던 당신을 어찌 잊을까요" )
힘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힘들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 허세욱 씨가 이런 경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또 내가 괴로우니 남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사람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 하던 다른 이들이 자신처럼 고통을 겪고나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승희 씨가 이런 경우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만 힘드냐,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만 뇌까리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이 있다. 앞서의 택시 기사, 그리고 허세욱 씨의 죽음을 비아냥대는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겨레 [박노자칼럼] 시장주의적 대중 독재의 도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03793.html
몇 년 전에 박정희 시대의 ‘대중독재’에 대한 논쟁이 학계의 관심사가 됐다. 국가주의의 대중적 내면화, 그리고 독재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강조했던 임지현 교수(한양대)의 논거를 놓고 봤을 때는 필자는 생각이 엇갈렸다. 박정희의 우민화 작업이 상당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이론이 지나치게 적용되는 경우 박정희 지배의 폭압적 본질도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도 무시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요즘 국내 상황을 보노라면 ‘대중독재’ 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독재는, 과거의 개발주의 폭압 정권이 아니고 자본의 이윤 극대화 이외에는 어떤 의제도 거부하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태, 즉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시장주의적 독재다.
한 사례를 들어볼까? 며칠 전에 금융노조가 은행 창구영업 시간을 한 시간 단축시켜 오후 3시30분까지로 할 것을 제안했다.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3시30분에 문 닫는 은행을 편하게 이용해온 필자로서는, 이 제안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는 은행권에서 감원이 심한데다 창구영업 이외의 업무가 늘어 8시반 이후의 퇴근이 일상화됐다는 점,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과 상사의 과도한 요구를 못견뎌 과로사한 은행 노동자들도 있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하지 않은가? 무인기계와 인터넷뱅킹이 발달된 이 시대에 과연 은행노동자를 장시간 창구업무에 종사시킬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보수언론들이 ‘배부른 노조’를 저주한 데 이어 90%를 넘는 대중이 은행 업무 시간 단축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제발 업무 스트레스를 좀 줄이게 해달라는 은행 노동자들의 호소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90%의 응답자들 중에서는, 분명히 스스로도 심한 업무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도, 머잖아 과로사로 요절할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실질적인 계급적 이익을 각성하지 못한 채 자본 독재에 대중적인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자본과 국가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는 교육과 매체를 통한 시장주의적 환상의 주입을 주된 요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강성노조가 국민 경제 좀먹는다’는 식의 기사 제목들을 늘 보는 대중들에게는 업무시간 단축으로 금융상품을 약간 덜 팔게 될지도 모를 은행자본의 사정은, 주주들의 배당금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의 사정보다 더 가까이 와닿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 형편이 주주보다 노동자에 더 가까운 수많은 대중들의 자본 독재 지지를, 단순히 ‘세뇌의 결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호, 일본 자본과의 제휴에 힘입어 이제는 아시아의 ‘아류 제국’으로 성장해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거의 200만명 넘는 노동자들을 부려먹을 수 있는 한국 자본의 ‘기적적인’ 개발 신화가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가려 한국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부추기기도 한다. 세계 자본 전체가 새로운 대공황의 구렁이에 빠져야 이 환상의 허구성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국가와 자본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상당부분도 ‘우향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다. 노동계급이 제대로 조직화되지도 급진화되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지금과 같은 ‘일 중독 사회’를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행복한, 여유와 흥미가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돈도 많이 버는 주제에 데모나 하냐',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그냥 참아라'
'그 정도 갖고 뭐가 힘들다고 하냐. 그냥 참아라'
왜 '나는 힘들지만 너의 길이 내게도 도움이 될 거다' 이런 게 안될까.
사회적 연대 의식은 채 자라기도 전에 모두들 파편화되고 거대 자본에 그저 휘둘리기만
할 뿐. 이런 때는 정말 '대중은 무지하다.'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휴우...
아래는 프레시안 기사 발췌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418192437
"저렇게 데모나 하는 새끼들,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데…."
고(故)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18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지나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계속 구시렁댔다. "허세욱 씨도 당신처럼 택시 기사였어요"라는 말이 목으로 넘어오려 했지만, 그냥 꾹 눌러 삼켰다.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이런 반응이 그다지 낯설지 않아서다. 각종 온라인 뉴스 사이트에 실린 고 허세욱 씨 관련 기사의 댓글 중에도 이런 내용이 흔하다. "택시 기사가 FTA에 대해 뭘 안다고…." "FTA가 택시 기사와 관계가 있나요? 별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분신을 한 거죠" 등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게 적나라한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
잠시 머뭇대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택시 기사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FTA는 해야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잖아요. 농민들이야 손해보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죠." 대화가 멎었다. 너무 익숙한 반응이어서 금새 흥미를 잃었다.
이 택시 기사처럼 한미FTA를 찬성하는 측도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이 있다는 데는 대개 동의한다. 대신 이렇게 피해를 보는 경우보다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판단이 정확한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리다.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한미FTA로 피해보는 이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면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고 여기고 있다면 분명히 병리적 상황이다. 자신이 누리게 될 이익이 약자의 피해를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당연시하는 게 정상일 리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질환일 수 있다.
앞서의 상황에서라면 "(피해보는 측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찬성한다"는 게 정상이다.
조승희 씨와 한국 사회의 닮은 점…남의 아픔에 공감 못 해
그런데 FTA 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접한 이날, 대부분의 매체가 하필 '총기난사'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버지니아공대 학생 조승희 씨의 총기난사 사건이다.
조 씨의 범행동기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직은 명확한 게 없다. 조 씨는 어떤 이유로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게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총에 맞아 희생될 이들,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 하고 있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누군가는 한미FTA로 피해를 본다"고 여기면서도 FTA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과 닮았다.
"내가 힘드니, 남은 덜 힘들었으면" vs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고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서울 시청 근처를 다 지나갔을 때, 택시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허세욱 씨)도 택시를 몰았다던데…. 택시 기사 중에 안 힘든 사람 있나요. 다 힘들지. 그렇다고 죽긴 왜 죽나."
"허세욱 씨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한미FTA가 체결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거예요." 맥없는 대답을 내놓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관련기사 : "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 "늘 따뜻했던 당신을 어찌 잊을까요" )
힘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힘들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 허세욱 씨가 이런 경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또 내가 괴로우니 남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사람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 하던 다른 이들이 자신처럼 고통을 겪고나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승희 씨가 이런 경우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만 힘드냐,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만 뇌까리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이 있다. 앞서의 택시 기사, 그리고 허세욱 씨의 죽음을 비아냥대는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겨레 [박노자칼럼] 시장주의적 대중 독재의 도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03793.html
몇 년 전에 박정희 시대의 ‘대중독재’에 대한 논쟁이 학계의 관심사가 됐다. 국가주의의 대중적 내면화, 그리고 독재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강조했던 임지현 교수(한양대)의 논거를 놓고 봤을 때는 필자는 생각이 엇갈렸다. 박정희의 우민화 작업이 상당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이론이 지나치게 적용되는 경우 박정희 지배의 폭압적 본질도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도 무시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요즘 국내 상황을 보노라면 ‘대중독재’ 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독재는, 과거의 개발주의 폭압 정권이 아니고 자본의 이윤 극대화 이외에는 어떤 의제도 거부하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태, 즉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시장주의적 독재다.
한 사례를 들어볼까? 며칠 전에 금융노조가 은행 창구영업 시간을 한 시간 단축시켜 오후 3시30분까지로 할 것을 제안했다.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3시30분에 문 닫는 은행을 편하게 이용해온 필자로서는, 이 제안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는 은행권에서 감원이 심한데다 창구영업 이외의 업무가 늘어 8시반 이후의 퇴근이 일상화됐다는 점,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과 상사의 과도한 요구를 못견뎌 과로사한 은행 노동자들도 있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하지 않은가? 무인기계와 인터넷뱅킹이 발달된 이 시대에 과연 은행노동자를 장시간 창구업무에 종사시킬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보수언론들이 ‘배부른 노조’를 저주한 데 이어 90%를 넘는 대중이 은행 업무 시간 단축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제발 업무 스트레스를 좀 줄이게 해달라는 은행 노동자들의 호소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90%의 응답자들 중에서는, 분명히 스스로도 심한 업무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도, 머잖아 과로사로 요절할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실질적인 계급적 이익을 각성하지 못한 채 자본 독재에 대중적인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자본과 국가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는 교육과 매체를 통한 시장주의적 환상의 주입을 주된 요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강성노조가 국민 경제 좀먹는다’는 식의 기사 제목들을 늘 보는 대중들에게는 업무시간 단축으로 금융상품을 약간 덜 팔게 될지도 모를 은행자본의 사정은, 주주들의 배당금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의 사정보다 더 가까이 와닿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 형편이 주주보다 노동자에 더 가까운 수많은 대중들의 자본 독재 지지를, 단순히 ‘세뇌의 결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호, 일본 자본과의 제휴에 힘입어 이제는 아시아의 ‘아류 제국’으로 성장해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거의 200만명 넘는 노동자들을 부려먹을 수 있는 한국 자본의 ‘기적적인’ 개발 신화가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가려 한국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부추기기도 한다. 세계 자본 전체가 새로운 대공황의 구렁이에 빠져야 이 환상의 허구성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국가와 자본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상당부분도 ‘우향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다. 노동계급이 제대로 조직화되지도 급진화되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지금과 같은 ‘일 중독 사회’를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행복한, 여유와 흥미가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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