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sh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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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선조의 컴플렉스

2003.12.08 08:30

RanomA 조회 수:1452

전에도 얘기했듯이 조선왕조 최초의 서출인 선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큰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컴플렉스는 명민하지만 서출인 광해군에게 악영향을 미쳐 영창

대군과 광해군의 비극적 최후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만다.

중종의 두 아들 인종과 명종이 모두 후사없이 죽게되자, 왕실과 중신들은 적당한

후보자를 물색한 끝에 중종의 9남인 창빈 안씨의 소생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을

조선 제 14대 왕으로 삼기로 했다. 중종의 아들도 아니며, 중종의 적자의 아들도 아닌

선조는 왕이 될 필연적인 혈통을 타고 난 게 아니라, 수많은 서손들중의 하나로

운이 좋게, 잘보여 선택된, 지극히 불안정한 지위로 추대된 존재였다.

선조 이전에 '군(君)' 출신으로 왕이 된 자는 8대 성종이 된 잘산군이었으나, 그 역시

요절한 '장경세자'의 적자였기때문에 선조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참고로 왕의 적자는 '대군', 서자는 '군'으로 위가 다르며, '대군'의 아들은 '군',

'군'의 아들은 그보다 더 낮은 '군'으로 봉해졌다.)

대원군으로 추존된 아버지 덕흥군의 묘를 '원(園)'에서 왕의 묘인 '능(陵)'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법전을 앞세운 신하들의 반대로 포기하고, 대신에 백성들에게 '덕흥대원군 능'

이라고 하면 상금을 주는 식의 방법으로 '덕릉(德陵)'으로 불리게 했다는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는 흔히들 얘기하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보다는 컴플렉스를 읽는다.

나이가 서서히 들어가 장성한 서자들이 여럿이 되는데도 끝까지 세자책봉을 거절하거나,

명민한 서자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자고 건의한 서인을 일거에 숙청시키는 것에서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떳떳하게 적자출생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똥고집을 피우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서야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는 했다. 자신은 비겁하게 국경 끝까지 도망쳐서 명나라로 가네 마네

하는 동안 광해군은 실질적인 왕으로서 민심과 전쟁의 지휘를 도맡아 왜란 극복의 큰

공헌을 세웠고, 선조 자신도 광해군을 치하하며 부자간의 애틋한 정마저 표시했으나...

임란이 끝난 후 다시금 쳐든 선조의 컴플렉스와 함께 왜란극복의 명망을 얻은 광해군의

위치에 정적으로까지 느끼게 된 선조는 이후 갖은 박해와 시비를 광해군에게 몰아붙였다.

트집잡기, 인간적으로 모욕주기, 세자책봉을 무를 방법을 찾기 등등.

그리고...

선조는 말년에 가서야 인목왕후로부터 그렇게도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창대군'을 얻지만,

강보에 싸인 핏덩이를 이미 세자가 된지 오래된 장성한 광해군과 교체하자는 말도 안되는

주장은 몇몇을 빼고는 다 반대하였기때문에 선조의 바램은 무산되고 만다.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선조가 살아있었으면 또 몰랐으되, 영창대군이 태어난지 2년만에 눈을

감았으니 세자의 위치를 엉망이 될 때까지 흔들어대놓고, 그렇다고 완전히 결말도 못본

상태에서 그냥 죽어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불안해진 세자가 취할 것은 반작용. 자신의 위치를 흔드는 위협요소인 영창대군과

형인 임해군의 존재는 왕조시대에서는 역적 그 자체. 선조가 광해군을 안심시켰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형제살육의 비극이 결국 일어나고 만다.

인목왕후 역시 차라리 영창대군을 낳지 않았더라면 대비로서 편안히 살아갔을텐데,

상황은 그녀를 처참한 비극으로 몰고 간다. 핏덩이 아들을 잃고, 늙으신 아버지마저 잃고,

자신은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어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게 됐다.

광해군 역시 '형제들을 죽이고, 어머니마저 폐서인시키는 도덕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했으므로 타도되어야 한다'는 구실을 서인측에 주게 되어,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크게

펼쳐보기도 전에 왕의 자리에 쫓겨나 18년 동안 회한에 젖은 채로 생을 마치게 된다.

물론 선조의 컴플렉스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종보다 왕위계승권이 앞섰던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과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예처럼 현명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 선조의 그 컴플렉스로 인해 피할

수 없게 만든 거다.

그의 컴플렉스를 그의 잘못으로 모는 것은 너무 가혹한 듯하지만, 출신의 컴플렉스를

선정으로 얻는 명망으로 상쇄하려고 노력했다던 트라야누스 황제와 비교하면 꽤나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시오노 나나미 추측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명문 귀족 출신도

아닌, 수도 출신도 아닌, 이탈리아 출신도 아닌 정복지의 이름없는 출신인 것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