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이인화와 영원한 제국
2003.01.14 00:14
내가 대학교 1학년 무렵에 이인화(앞으로 '닭대가리'로 칭하기로 한다)의
'영원한 제국'이 사람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끌면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었는데, 왠지 사람들에게 말이 많은 작품이었다. 나는 3학년때
읽게 되었었는데 상당히 꽤 재미있으면서 신선한 작품으로 읽었었다.
도입 초기에 기존의 역사책에서는 무시했던 정치적 상황을 현대적 감각의
것으로 풀이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입부 부분에 보이는 금난전권의
경제적, 정치적 의미의 해석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유신에 대한 찬양과,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결국 자신이 닭대가리임을 밝히고 만다. 그후
'인간의 길'이라는 희대의 코미디물을 내놓으면서 만천하에 자신이
닭대가리임을 증명하는 데 무진장 애쓰는 모습이 가히 심형래를
능가한다 하겠다.
영원한 제국 작품 뒷편에 작가 후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그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얘기가 보인다. 그 얘기가 무언고 하니 어렸을 적
집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정조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얘기이다. 그 말 속에는 정조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이 가득 들어있는
말투였다. 소설 역시 그런 식으로 나가고 있다.
정조의 업적 자체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왜 닭대가리의 어른들이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역적 얘기를 해보고자 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아시다시피 정조는 노론의 모진 박해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노론에 의해서 항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세손으로
있었으며, 즉위할 때에도 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른 경험을 가진
왕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탕평책이라는 명분 하에 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다.
또한 그 외에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남인과 서인의 철학의
차이인 것이다. 남인은 경상 좌도의 남명 조식과 경상 우도의
퇴계 이황의 학파로 분류가 되면서 지역적 기반은 영남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서인은 율곡 이이와 (이이 자신은
당파에 속하지 않았지만 붕당 초기 동인의 소아병적인 태도로
인해 중립을 지키던 자신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서인에 가까워져
보이는 듯하게 되어 서인들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다고
자부한다.) 우계 성혼의 학통을 잇고 있으며, 지역적 기반은 기호
지방이다.
동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실각한 정철의 처리 문제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후에, 북인이 광해군대에 절정의 권력을 자랑하다
인조반정과 더불어 전멸된 후에 유일하게 동인의 계보를 잇는 붕당이
되지만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득세하게 된 서인에 의해서 만년 야당의
위치가 된다. 서인은 인조반정 후 국혼물실('國婚勿失': 왕비는 항상
서인의 집안에서 나와서 서인의 권력기반이 되어야 한다) 정책에 의해서
권세를 자랑하게 된다.
서인은 그후 남인의 처리과정에서 강경파 노론과 온건파 소론으로
갈리게 되며, 숙종 이후 노론이 정권을 계속적으로 잡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숙종대에 '장희빈'과 함께 남인이 잠시 득세를
하는 때가 있다. 인현왕후는 서인집안의 사람이었다. 즉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흥망성쇠는 정치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흥망성쇠와
같이 한다.)
서인과 남인의 왕에 대한 견해차이는 예송논쟁에서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서인은 임금도 역시 사대부가 지켜야 하는 성리학 예법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즉 단순히 사대부의 수장일 뿐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예송논쟁을 진행하는 데 비해서, 남인은 임금은
사대부와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이며, 임금만의 독자적인 예법이
있다고 논리로 맞선다.
이 점에서 정조는 서인 출신의 노론의 득세와 권세가 마음에
안들었을 뿐더러 왕권강화를 위한 논리로 남인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노론은 이미 왕권을 넘어서는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던 정조가 남인을 등용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노론은 남인출신의 '장희빈'이 낳은 경종을 즉위 초에 협박하여
서인이 지지하고 있던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게 만든다.
성리학 예법에서 형제가 적통을 잇는 법은 없으며, 적자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노론은 강제적으로 세제의 자리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책봉하도록 만든 것이다. 영조가
즉위 초기에는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론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경종이
죽을 때 독살의 의혹마저 강하게 제기되고 있던 상황에서 영조는
결과적으로 노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론의 전횡 속에서 즉위한 정조는 당연히 남인, 그리고 규장각을
통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조의 그러한 조치에 서인에 눌려 만년 야당도 아니고 재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영남출신의 남인들은 열광했으며, 영남의 재야 유림들은
영남만인소(만명의 사람이 상소를 올리는 것)를 통해서 정조의 힘을 실어
주려 했던 것이다.
영남만인소 후에 정조는 그들에게 글을 내려 그들의 충정에 감동했으며
그들의 뜻을 곧 따르겠다고 했으나, 그 얼마 후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 것이다. 정조에 의해서 다시 정권의 회복을 꿈꾸던 남인과
영남의 유림들은 크나큰 좌절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독살설(사실 정황적으로 보았을 때 가능성이 큰 얘기이기는 하다.)을
가슴 깊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 좌절들은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정조의
숱한 신화들이 그 어느 지방에서보다 영남지방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고, 닭대가리의 어른들에게까지 전해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닭대가리는 왕조와 강력한 권력을 꿈꾸던 차에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를 다시 소설로 재구성하게 되었으며, 정조의 현신을 빡통으로
보는 코미디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변모하여 지금의 가장 큰 헤게모니를 쥔 지역은
영남이며, 그 한편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숨어들어있는 동시에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빡통을 추모하는 인간들이 우리나라의 헤게모니를
잡고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사실이라고 하겠다. 왕조시대의
권력적 속성과 민주주의 시대의 권력적 속성이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모습과 빡통에 비교하는 닭대가리의 일련의 행보는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꽤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
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영삼이 씹새가 워낙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빡통이 나아보였다라는 사실 또한 열받는 것이고)
'영원한 제국'이 사람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끌면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었는데, 왠지 사람들에게 말이 많은 작품이었다. 나는 3학년때
읽게 되었었는데 상당히 꽤 재미있으면서 신선한 작품으로 읽었었다.
도입 초기에 기존의 역사책에서는 무시했던 정치적 상황을 현대적 감각의
것으로 풀이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입부 부분에 보이는 금난전권의
경제적, 정치적 의미의 해석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유신에 대한 찬양과,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결국 자신이 닭대가리임을 밝히고 만다. 그후
'인간의 길'이라는 희대의 코미디물을 내놓으면서 만천하에 자신이
닭대가리임을 증명하는 데 무진장 애쓰는 모습이 가히 심형래를
능가한다 하겠다.
영원한 제국 작품 뒷편에 작가 후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그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얘기가 보인다. 그 얘기가 무언고 하니 어렸을 적
집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정조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얘기이다. 그 말 속에는 정조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이 가득 들어있는
말투였다. 소설 역시 그런 식으로 나가고 있다.
정조의 업적 자체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왜 닭대가리의 어른들이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역적 얘기를 해보고자 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아시다시피 정조는 노론의 모진 박해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노론에 의해서 항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세손으로
있었으며, 즉위할 때에도 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른 경험을 가진
왕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탕평책이라는 명분 하에 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다.
또한 그 외에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남인과 서인의 철학의
차이인 것이다. 남인은 경상 좌도의 남명 조식과 경상 우도의
퇴계 이황의 학파로 분류가 되면서 지역적 기반은 영남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서인은 율곡 이이와 (이이 자신은
당파에 속하지 않았지만 붕당 초기 동인의 소아병적인 태도로
인해 중립을 지키던 자신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서인에 가까워져
보이는 듯하게 되어 서인들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다고
자부한다.) 우계 성혼의 학통을 잇고 있으며, 지역적 기반은 기호
지방이다.
동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실각한 정철의 처리 문제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후에, 북인이 광해군대에 절정의 권력을 자랑하다
인조반정과 더불어 전멸된 후에 유일하게 동인의 계보를 잇는 붕당이
되지만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득세하게 된 서인에 의해서 만년 야당의
위치가 된다. 서인은 인조반정 후 국혼물실('國婚勿失': 왕비는 항상
서인의 집안에서 나와서 서인의 권력기반이 되어야 한다) 정책에 의해서
권세를 자랑하게 된다.
서인은 그후 남인의 처리과정에서 강경파 노론과 온건파 소론으로
갈리게 되며, 숙종 이후 노론이 정권을 계속적으로 잡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숙종대에 '장희빈'과 함께 남인이 잠시 득세를
하는 때가 있다. 인현왕후는 서인집안의 사람이었다. 즉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흥망성쇠는 정치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흥망성쇠와
같이 한다.)
서인과 남인의 왕에 대한 견해차이는 예송논쟁에서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서인은 임금도 역시 사대부가 지켜야 하는 성리학 예법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즉 단순히 사대부의 수장일 뿐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예송논쟁을 진행하는 데 비해서, 남인은 임금은
사대부와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이며, 임금만의 독자적인 예법이
있다고 논리로 맞선다.
이 점에서 정조는 서인 출신의 노론의 득세와 권세가 마음에
안들었을 뿐더러 왕권강화를 위한 논리로 남인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노론은 이미 왕권을 넘어서는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던 정조가 남인을 등용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노론은 남인출신의 '장희빈'이 낳은 경종을 즉위 초에 협박하여
서인이 지지하고 있던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게 만든다.
성리학 예법에서 형제가 적통을 잇는 법은 없으며, 적자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노론은 강제적으로 세제의 자리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책봉하도록 만든 것이다. 영조가
즉위 초기에는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론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경종이
죽을 때 독살의 의혹마저 강하게 제기되고 있던 상황에서 영조는
결과적으로 노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론의 전횡 속에서 즉위한 정조는 당연히 남인, 그리고 규장각을
통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조의 그러한 조치에 서인에 눌려 만년 야당도 아니고 재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영남출신의 남인들은 열광했으며, 영남의 재야 유림들은
영남만인소(만명의 사람이 상소를 올리는 것)를 통해서 정조의 힘을 실어
주려 했던 것이다.
영남만인소 후에 정조는 그들에게 글을 내려 그들의 충정에 감동했으며
그들의 뜻을 곧 따르겠다고 했으나, 그 얼마 후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 것이다. 정조에 의해서 다시 정권의 회복을 꿈꾸던 남인과
영남의 유림들은 크나큰 좌절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독살설(사실 정황적으로 보았을 때 가능성이 큰 얘기이기는 하다.)을
가슴 깊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 좌절들은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정조의
숱한 신화들이 그 어느 지방에서보다 영남지방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고, 닭대가리의 어른들에게까지 전해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닭대가리는 왕조와 강력한 권력을 꿈꾸던 차에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를 다시 소설로 재구성하게 되었으며, 정조의 현신을 빡통으로
보는 코미디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변모하여 지금의 가장 큰 헤게모니를 쥔 지역은
영남이며, 그 한편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숨어들어있는 동시에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빡통을 추모하는 인간들이 우리나라의 헤게모니를
잡고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사실이라고 하겠다. 왕조시대의
권력적 속성과 민주주의 시대의 권력적 속성이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모습과 빡통에 비교하는 닭대가리의 일련의 행보는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꽤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
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영삼이 씹새가 워낙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빡통이 나아보였다라는 사실 또한 열받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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