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시와요. 언제나 역사책을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즐거이 읽는
깅수가 또 슬슬 아는 척을 해보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읽다 보면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비(임금의 어머니 말입니다.)의 상복을 3년이냐, 1년이냐 서로 논쟁을
펼치다가 서인의 패배로 남인으로 정권이 바뀌었다로 아주 간략하게
나오죠. 대부분의 국사선생님이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가르쳐주셨을
리 만무하고 해서 오늘은 자세히 얘기해보자 합니다. 저도 사실은 이덕일
이라는 사람이 쓴 '당쟁으로 본 조선역사'라는 책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예송논쟁은 현종(18대)조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 일의 근원은 꽤 오래전
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정권의 실질적인 반정 명분은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서인시킨 광해군의 불효함을 꾸짖고,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벌이는 광해군의 정책 대신에 임진왜란때 파병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었죠. 그러한 정책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불편해
지자, 결국 양대 호란이 일어나고 말았죠. 그 와중에 세자인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갑니다. 잡혀갈 때만
해도 극진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던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는 소현
세자의 청나라 문물과 서양에 대한 개화적인 자세로 인해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를 즉위시킬 지도 모른다라는 인조의 두려움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세자가 귀국한 후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자는
급서하고, 세자빈과 세자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두 귀양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아버지가 아들을 독살시켰다고 봐야
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세자빈 강씨와 아들들이 죽어야 했겠습니까.
이는 세자빈 강씨와 손자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봉림대군을 왕으로
삼겠다라는 인조의 생각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예법이 강화되면서, 대를 잇는 것은 장자 뿐이어야 하고,
장자가 안되면 장자의 아들, 그렇지 못하다면 장자에 양자를 들여서
그 양자에게 대를 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 죽고 어린 소현세자의 세째 아들만 남게 되자, 비로소
봉림대군은 무사히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죠.
효종은 즉위한 후에도 내내 정통성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북벌이라는 원대한 정책도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
나고자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죠. 형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키자고 하다가 죽은 것이라면
자신은 반대로 청을 정벌해야하는 거죠. 물론 거기에는 언제든지 반정을
일으킬 수도 있는 서인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필요한
것이었고요. (박지원의 허생전에 보면 북벌론의 허가 통렬히 드러나죠)
그래서인지 살아있던 소현세자의 마지막 아들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금기였으며, 조언을 구한다고 해서 받았던 상소에서 소현세자의 아들의
귀양을 풀어달라는 얘기를 듣자, 그 상소자를 죽여버리고 말죠. 결국
소현세자의 마지막 아들도 효종에게 죽고 맙니다.
하지만 효종은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하고 결국 즉위한 지 10년만에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효종이 죽을 무렵, 대비, 즉 아버지 인조의 비가 살아
있었던 거죠. 이 대비는 인조가 말년에 다시 장가를 가서 얻은 왕비로
효종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어머니였던 셈이죠.
여기서 이 대비의 상복을 몇 년 입느냐에 따라서 저 유명한 예송논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규범이 된 예법에 관한 책이 몇 개 있는데, 명의 법전과도
같은 대명률과, 고대부터 내려오는 예를 적어놓은 고례라는 책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헌데... 대명률에 보면 장자가 죽었을 때에는 부모는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차자가 죽었을 때에는 1년 동안 입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대통을 잇는 장자를 우대한 셈이죠. 하지만 고례에는
장,차자 관계없이 1년복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서인의 영수이자, 대학자이며 효종의 스승인 송시열은 1년복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남인 쪽에서는 3년이라고 제시를 했죠. 즉
송시열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었고, 왕위(종통)은 이었지만
가족의 대(대통)는 소현세자의 것이라고 보았던 거죠. 그래서 대명률에
따라 효종은 차남이고, 고로 1년복이라는 거였죠. 그에 비해 남인은
효종은 어쨌거나 왕위를 이었고, 종통을 잇는다는 것은 장남임에
틀림없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명률에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송시열은 여기까지는 서로간의 견해와 학설의 차이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며, 1년이라는 것의 근거가 대명률이 아니라
고례라고 제시함으로써 얼버무리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남인 윤선도가 정면으로 반박하며 나서면서
동시에 굉장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얘기로 끌어올리고 맙니다.
즉, 송시열이 주장하는 1년복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며, 또한 종통을
잇지 못하고,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가짜 왕이라는 생각을 송시열이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몰아붙입니다. 졸지에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론의 이론을 제시하며 10년 동안 동지로 지내온 송시열이 효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가짜라고 생각하는
역적으로 몰리게 된 거죠.
처음에는 온화한 학문적 논의가 정권을 가져오려는 남인의 공세에 의해
목숨과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권력투쟁이 되고 만 거죠. 사실 윤선도도
효종의 스승이었지만, 남인이었기 때문에 송시열보다 대접을 적게
받고, 박해받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인지 그리도 심하게 공격을 하고
만 거죠.
이에 서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서 일치단결하여 윤선도를 몰아붙입니다.
현종은 아무리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좋지만 내심 불안한 아버지의
정통성이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 언짢았기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내며
윤선도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효종의 스승이라는 것으로
인해 용서를 하고, 두번 다시 예송논쟁을 하지 말고, 대비의 상복은
1년복으로 하라고 명령하며 논쟁을 종결짓습니다.
But... 문제는 여전히 시한폭탄처럼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 대비는 인조의 말년에 얻은 아주 어린 왕비였기 때문에
아들이 먼저 죽고 말아서 문제가 생겼던 건데... 며느리가 아직 살아
있었던 거고, 며느리가 나이상 먼저 죽을 위험이 높았던 거죠. 현종의
어머니가 되는 그 며느리는 역시 우려대로 먼저 죽고 맙니다...
대명률에 따르면 장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1년복을 입습니다.
차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때에는 9개월을 입게 되는 거죠. 고례에서는
구분없이 9개월입니다. 송시열과 서인은 고례의 예를 들어 9개월을
주장하려고 하는데 뭔가 너무 작습니다. 그렇다고 1년을 주장하려니
효종이 죽었을 때와는 얘기가 달라지는 거고, 무엇보다 효종때와
효종비와 같은 1년이라는 건 남녀가 유별한데 말이 안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 9개월을 주장하지만 남인쪽에서는 9개월이 아니라
1년이며, 앞의 효종때에 송시열이 잘못했었다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현종도 이제는 어느 정도 왕위의 안정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차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니 이제는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고 싶었던지
서인쪽에 엄하게 추궁을 합니다. 결국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던
서인은 제대로 변명을 못하고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대명률에서조차도 떳떳한 입장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즉 효종이 죽었을
때는 3년복이었고,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1년복이라는 결론을 취하는
거죠. 자신의 아버지의 정통성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자신 역시
전혀 문제가 없다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능멸했다고 여겨지는 서인 정권을 내치고 맙니다.
자, 별 것 아닌 상복 입는 기간 속에 명분과 정통성이 모든 걸 결정
짓던 조선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왕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 숨어있는
줄 이제 다들 아시게 되었는지요... 분명 백성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소모적인 당쟁이었지만, 결코 이유없이 시간남아돌아서 했던
짓이 아니었던 겁니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던 것이었죠. 왕은 왕위에 오르는 순간 성스러운 존재가 되어
장남이고, 차남이고 관계가 없다라는 왕쪽의 남인과, 왕 역시 하나의
사람이며, 단순한 양반의 수장일 뿐이라는 서인의 사상이 대립한 사상
논쟁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례에 따라서 서인은 계속 왕권을 흔들게 되며, 남인은 취약한
기반을 이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왕의
입장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정조때
강한 왕권을 추구하던 정조가 남인과 영남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죠.
깅수가 또 슬슬 아는 척을 해보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읽다 보면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비(임금의 어머니 말입니다.)의 상복을 3년이냐, 1년이냐 서로 논쟁을
펼치다가 서인의 패배로 남인으로 정권이 바뀌었다로 아주 간략하게
나오죠. 대부분의 국사선생님이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가르쳐주셨을
리 만무하고 해서 오늘은 자세히 얘기해보자 합니다. 저도 사실은 이덕일
이라는 사람이 쓴 '당쟁으로 본 조선역사'라는 책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예송논쟁은 현종(18대)조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 일의 근원은 꽤 오래전
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정권의 실질적인 반정 명분은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서인시킨 광해군의 불효함을 꾸짖고,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벌이는 광해군의 정책 대신에 임진왜란때 파병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었죠. 그러한 정책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불편해
지자, 결국 양대 호란이 일어나고 말았죠. 그 와중에 세자인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갑니다. 잡혀갈 때만
해도 극진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던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는 소현
세자의 청나라 문물과 서양에 대한 개화적인 자세로 인해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를 즉위시킬 지도 모른다라는 인조의 두려움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세자가 귀국한 후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자는
급서하고, 세자빈과 세자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두 귀양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아버지가 아들을 독살시켰다고 봐야
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세자빈 강씨와 아들들이 죽어야 했겠습니까.
이는 세자빈 강씨와 손자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봉림대군을 왕으로
삼겠다라는 인조의 생각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예법이 강화되면서, 대를 잇는 것은 장자 뿐이어야 하고,
장자가 안되면 장자의 아들, 그렇지 못하다면 장자에 양자를 들여서
그 양자에게 대를 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 죽고 어린 소현세자의 세째 아들만 남게 되자, 비로소
봉림대군은 무사히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죠.
효종은 즉위한 후에도 내내 정통성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북벌이라는 원대한 정책도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
나고자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죠. 형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키자고 하다가 죽은 것이라면
자신은 반대로 청을 정벌해야하는 거죠. 물론 거기에는 언제든지 반정을
일으킬 수도 있는 서인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필요한
것이었고요. (박지원의 허생전에 보면 북벌론의 허가 통렬히 드러나죠)
그래서인지 살아있던 소현세자의 마지막 아들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금기였으며, 조언을 구한다고 해서 받았던 상소에서 소현세자의 아들의
귀양을 풀어달라는 얘기를 듣자, 그 상소자를 죽여버리고 말죠. 결국
소현세자의 마지막 아들도 효종에게 죽고 맙니다.
하지만 효종은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하고 결국 즉위한 지 10년만에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효종이 죽을 무렵, 대비, 즉 아버지 인조의 비가 살아
있었던 거죠. 이 대비는 인조가 말년에 다시 장가를 가서 얻은 왕비로
효종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어머니였던 셈이죠.
여기서 이 대비의 상복을 몇 년 입느냐에 따라서 저 유명한 예송논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규범이 된 예법에 관한 책이 몇 개 있는데, 명의 법전과도
같은 대명률과, 고대부터 내려오는 예를 적어놓은 고례라는 책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헌데... 대명률에 보면 장자가 죽었을 때에는 부모는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차자가 죽었을 때에는 1년 동안 입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대통을 잇는 장자를 우대한 셈이죠. 하지만 고례에는
장,차자 관계없이 1년복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서인의 영수이자, 대학자이며 효종의 스승인 송시열은 1년복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남인 쪽에서는 3년이라고 제시를 했죠. 즉
송시열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었고, 왕위(종통)은 이었지만
가족의 대(대통)는 소현세자의 것이라고 보았던 거죠. 그래서 대명률에
따라 효종은 차남이고, 고로 1년복이라는 거였죠. 그에 비해 남인은
효종은 어쨌거나 왕위를 이었고, 종통을 잇는다는 것은 장남임에
틀림없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명률에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송시열은 여기까지는 서로간의 견해와 학설의 차이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며, 1년이라는 것의 근거가 대명률이 아니라
고례라고 제시함으로써 얼버무리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남인 윤선도가 정면으로 반박하며 나서면서
동시에 굉장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얘기로 끌어올리고 맙니다.
즉, 송시열이 주장하는 1년복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며, 또한 종통을
잇지 못하고,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가짜 왕이라는 생각을 송시열이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몰아붙입니다. 졸지에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론의 이론을 제시하며 10년 동안 동지로 지내온 송시열이 효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가짜라고 생각하는
역적으로 몰리게 된 거죠.
처음에는 온화한 학문적 논의가 정권을 가져오려는 남인의 공세에 의해
목숨과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권력투쟁이 되고 만 거죠. 사실 윤선도도
효종의 스승이었지만, 남인이었기 때문에 송시열보다 대접을 적게
받고, 박해받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인지 그리도 심하게 공격을 하고
만 거죠.
이에 서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서 일치단결하여 윤선도를 몰아붙입니다.
현종은 아무리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좋지만 내심 불안한 아버지의
정통성이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 언짢았기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내며
윤선도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효종의 스승이라는 것으로
인해 용서를 하고, 두번 다시 예송논쟁을 하지 말고, 대비의 상복은
1년복으로 하라고 명령하며 논쟁을 종결짓습니다.
But... 문제는 여전히 시한폭탄처럼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 대비는 인조의 말년에 얻은 아주 어린 왕비였기 때문에
아들이 먼저 죽고 말아서 문제가 생겼던 건데... 며느리가 아직 살아
있었던 거고, 며느리가 나이상 먼저 죽을 위험이 높았던 거죠. 현종의
어머니가 되는 그 며느리는 역시 우려대로 먼저 죽고 맙니다...
대명률에 따르면 장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1년복을 입습니다.
차자의 며느리가 죽었을 때에는 9개월을 입게 되는 거죠. 고례에서는
구분없이 9개월입니다. 송시열과 서인은 고례의 예를 들어 9개월을
주장하려고 하는데 뭔가 너무 작습니다. 그렇다고 1년을 주장하려니
효종이 죽었을 때와는 얘기가 달라지는 거고, 무엇보다 효종때와
효종비와 같은 1년이라는 건 남녀가 유별한데 말이 안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 9개월을 주장하지만 남인쪽에서는 9개월이 아니라
1년이며, 앞의 효종때에 송시열이 잘못했었다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현종도 이제는 어느 정도 왕위의 안정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차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니 이제는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고 싶었던지
서인쪽에 엄하게 추궁을 합니다. 결국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던
서인은 제대로 변명을 못하고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대명률에서조차도 떳떳한 입장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즉 효종이 죽었을
때는 3년복이었고,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1년복이라는 결론을 취하는
거죠. 자신의 아버지의 정통성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자신 역시
전혀 문제가 없다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능멸했다고 여겨지는 서인 정권을 내치고 맙니다.
자, 별 것 아닌 상복 입는 기간 속에 명분과 정통성이 모든 걸 결정
짓던 조선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왕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 숨어있는
줄 이제 다들 아시게 되었는지요... 분명 백성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소모적인 당쟁이었지만, 결코 이유없이 시간남아돌아서 했던
짓이 아니었던 겁니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던 것이었죠. 왕은 왕위에 오르는 순간 성스러운 존재가 되어
장남이고, 차남이고 관계가 없다라는 왕쪽의 남인과, 왕 역시 하나의
사람이며, 단순한 양반의 수장일 뿐이라는 서인의 사상이 대립한 사상
논쟁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례에 따라서 서인은 계속 왕권을 흔들게 되며, 남인은 취약한
기반을 이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왕의
입장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정조때
강한 왕권을 추구하던 정조가 남인과 영남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