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 와서 나가사키 사진을 뒤돌아보면 3가지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1. 외국문물과의 접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개창한 에도(도쿄) 막부가 허용한 유일한 개항 지점.

2. 그 덕분에 일본 카톨릭의 성지가 되었다는 것.

3. 원자폭탄

 

그 중에서 2번 항목과 관련된 게 카쿠레(숨은) 키리시탄(크리스천)인데, 아래의 내용은 나무위키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센코쿠(戰國) 시대에 나라가 사방 팔방으로 쪼개져서 싸운 때라 (이걸 통일 시킨 게 오다 노부나가랑 토요토미 히데요시) 몇몇 영주들은 서양과의 무역에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서양과 교류를 했고, 일부 영주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부터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다 상황이 바뀌게 된 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는데, 통일 후 이제는 각지의 영주들이 서양과의 무역을 통한 이익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거기에 요즘에도 간혹 광신적인 개신교도들이 난리치듯이, 저때도 몇몇 광신도들은 일본의 절을 공격하여 불상을 파괴하는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서양과의 교역의 첨병인 선교사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문제를 일으킨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키리시탄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나중에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에서는 힘으로 진압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면서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나가사키의 운젠 쪽에 가면 탄압된 키리시탄들을 기리는 유적이 많아서 기독교 신자들의 관광 테마로도 이용된다.

키리시탄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키리시탄들은 정부를 뒤엎으려는 불순분자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정부는 예수의 형상을 밟도록 강요해서 신자 여부를 찾아내는 '후미에' 등의 방법을 통해 철저한 탄압을 가한다. 이런 탄압으로 키리시탄들은 많이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막부와 (에도 = 도쿄) 가장 멀리 떨어진 나가사키에는 키리시탄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음지로 숨어버렸다. 물론 막부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으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드러내지만 않으면 놔두는 식으로 관리했다.

그렇게 20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되자, 유신 측의 주요인사이자, 나가사키와 같은 큐슈의 가고시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면서 다시금 서양인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첨에는 프랑스 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을 가본 몇몇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프랑스 절에 성모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카쿠레키리시탄들이 구경을 핑계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는 신부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맞는지 확인한 후에 일제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 상에서도 매우 희귀한 경우로 '신자 발견'이라고 하며, 한동안 일본과 연락이 끊어졌던 서양 교계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과 같이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이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숨기면서 전승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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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보면 우리도 흔히 아는 관음보살상과 매우 흡사하다. 관음보살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많지 않으나 대자대비하신 분이라서 저런 모습도 있을 법하다. 그리고 실제로는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모시던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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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건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는데, 카쿠레키리시탄들에게는 불상인 척하고는 실제로는 예수의 상으로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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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고 한다. 사실 키리시탄들이 탄압받을 때에는 아직 기독교의 역사가 길지 못해 깊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자체적으로 사제(전문 성직자)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외우며 입으로 전해지던 신앙은 서양과는 매우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외부와 단절된 문화가 독자적으로 전래되면서 어떤 형태로 변형되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되기 때문.

또한 이렇게 강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변질되어버리는 어쩔 수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인간의 강렬한 종교 열망을 나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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